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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편지로 바꾸는 프랑스 정치
2018-04-10 06:00:00 2018-04-10 06:00:00
지난 2일은 ‘세계 자폐증 인식의 날(World Autism Awareness Day)’ 11주년이었다. 유엔은 2007년부터 매년 4월2일을 ‘세계 자폐증 인식의 날’로 지정하고 행사를 열고 있다. 소외와 몰이해로 이중의 고통을 겪는 자폐증 환자들의 상황을 인식하고 그들의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자폐증은 3세 이전에 발현하며, 증상의 진퇴는 있으나 거의 평생 지속되는 발달장애이다. 언어표현·이해능력 장애와 반복행동, 놀이행동 위축, 지능 등 인지발달 저하 등 다양한 증상을 보인다. 자폐증 환자는 전 세계 인구의 약 1%로 추정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자폐증 인식의 날을 앞둔 지난달 31일 한 자폐아 어머니가 대통령 내외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12세인 뤼뱅(Ruben)의 어머니이자 SOS 자폐증 단체 회장인 올리비아 카탕(Olivia Cattan)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영부인 브리지트에게 “자폐증 아이들의 부모는 휴가도, 휴식도 없다”며 ‘마셜플랜(원조계획)’을 제시해 줄 것을 호소했다. 다음은 카탕 회장의 공개편지이다.
 
“공화국 대통령과 영부인 브리지트 마크롱께. 한 자폐아이의 어머니이자 35세의 자폐증 여동생을 두고 있는 사람으로 수 년 간 자폐아들 곁에서 일했습니다. 저는 프랑스 SOS 자폐증 환자 연합회의 회장으로 우리 사회에서 자폐증 환자들이 배제되지 않도록 의식화하기 위해 다양한 행동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대통령 내외분은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신들은 이러한 대의에 관심을 보이고 계십니다. 저는 자폐증 환자 가족들의 삶을 바꾸기 위해 일해 왔고, 여러 제안을 하기 위해 당신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오늘 자폐증 인식의 날에도 수백만 명의 프랑스인들이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당신들은 이 상황을 알고 있고, 프랑스는 40년 뒤쳐져 있습니다. 이는 하루아침에 만회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20%의 자폐아동 만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고, 2%만이 취업의 문턱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자폐증이 있는 성인들의 상황은 최악입니다. 이들을 돌볼 의사들과 건강관계자들은 양성되지 않고 있으며, 학교생활 보조 인력과 선생님들은 충분치 않습니다. 전문의 상담에 드는 비용은 너무 비싸고, 사회보장으로 환급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선한 의지로 장애인 전담 여성장관이 임명됐음에도 관심의 정도는 조금 변했을 뿐이고, 변화의 속도도 매우 느립니다. 우리 아이들은 자라고 있고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정책적 시간은 우리의 긴급한 상황과 일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폐증을 위한 마셜플랜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 편지에 화답하듯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5일 새로운 대책을 밝혔다. 이 대책은 마크롱 대통령이 취임 후 9개월 동안 관련 단체 및 행동가들과 함께 구상한 것으로 앞으로 5년 간(2018-2022년) 3억4400만유로(한화 약 4503억원)를 자폐증 환자를 위해 쓰는 ‘국가 전략’이다.
 
이 새로운 계획은 필리프 수상이 소피 클뤼젤(Sophie Cluzel) 장애인 전담부처 장관과 보다 구체화해야 한다. 이 둘은 5일 아침 파리 근교에 있는 마른 라 발레(Marne la Vallee) 세계 자폐증 박람회를 방문했다. 같은 날 오후 필리프 수상은 아네스 뷔젱 보건부 장관과 장-미쉘 블랑케르 교육부 장관, 프레데리크 비달 고등교육과 연구 장관에게 새 계획을 발표했다. 그 중 가장 혁신적인 것 하나는 2019년 1월1일부터 초기 불안이 발견된 상태에서 정신치료 전문의(정신운동훈련자, 사회복귀를 위한 작업요법사, 신경심리학자 등) 치료를 건강보험으로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 역시 자폐증 환자가 늘고 있다. 한 조사결과를 보면 초등학생 100명 중 약 3명이 자폐 증상을 보이고 있다. 기존에 알려진 수치보다 2배 이상 높은 결과다. 3명 중 2명은 임상적으로 진단하기 어려운 가벼운 증세이기 때문에 부모들도 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폐증 환자와 가족 등 주변인은 고통을 겪고, 사회적으로 인권의 취약한 자리에 노출되고 있다.
 
문재인정부는 마크롱정부처럼 획기적인 플랜은 제시할 수 없다하더라도 자폐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관심을 보여야 할 때다. 물론 우리 국민들도 카탕 회장처럼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심도 있고 진솔한 이야기로 당당하게 정치인들에게 요구할 줄 알아야 사회를 바꿀 수 있다. 새 정부 들어 청와대에 국민청원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그 청원들 중에는 의아하고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 너무 많다. 청와대가 저걸 어떻게 수렴해 어떻게 정책에 반영하고 있는지 궁금하며 일부는 피드백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청원제도보다는 자신의 실제 경험을 담은 진솔한 편지 한 장이 사회를 움직이는데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다고 청원제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제도를 유용하게 활용하는 것은 시민의 몫이다. 청원제도를 좀 더 신중히 이용함과 동시에, 프랑스인들처럼 직접 상황을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공개편지를 통해서도 정치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최인숙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프랑스 정치현상을 잣대로 한국의 정치현실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 ‘빠리정치 서울정치(매경출판)’를 펴냈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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