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답을 잘할수록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더 좋은 질문이다. 한때 ‘문송합니다’의 대표 학과로 여겨졌던 철학과가 AI 시대에 다시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27학년도 수시모집에서 서울대 철학과는 일반전형 9명 모집에 139명이 지원해 15.44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고려대 철학과는 논술전형에서 4명 모집에 452명이 지원해 113대 1, 연세대 철학과는 논술전형에서 4명 모집에 312명이 지원해 78대 1을 기록했다.
단순한 인문학 열풍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다.
과거에는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제 AI에게 질문하면 수많은 자료를 순식간에 찾고 정리할 수 있다. 지식을 많이 외우는 것만으로는 AI와 차별화하기 어려워졌다. 이제는 무엇을 물을 것인지, 그리고 그 질문이 제대로 된 질문인지 판단하는 능력이 중요해졌다.
예를 들어 AI에게 “청년 주거정책의 장단점을 알려줘”라고 묻는 것과 “이 정책으로 실제 혜택을 받는 사람과 오히려 불리해지는 사람은 누구인가. 통계에서 빠진 집단은 없는가”라고 묻는 것은 결과가 다를 수밖에 없다. 질문이 달라지면 AI가 찾아내는 정보와 생각의 방향도 달라진다.
AI의 가장 큰 위험은 틀린 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틀린 질문에도 너무 그럴듯하게 답한다는 데 있다. 질문에 잘못된 전제가 들어 있어도 AI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논리적인 답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서 AI 시대에는 무엇을 물을지뿐 아니라 내가 당연하게 받아들인 전제가 정말 맞는지도 따져야 한다.
철학의 강점은 바로 이런 사고 훈련에 있다. 무엇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인지, 주장의 전제는 무엇인지, 서로 충돌하는 가치 가운데 무엇을 따져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AI가 답을 만들어주는 시대일수록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질문하는 능력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이런 변화는 AI 기업에서도 나타난다. 철학 박사 출신인 아만다 아스켈은 Anthropic에서 AI의 성격과 가치에 관한 업무를 이끌고 있다. 그가 주요 저자로 참여한 Claude의 ‘헌법’은 AI가 어떤 가치와 행동 원칙을 따라야 하는지를 담고 있다. AI의 성능을 높이는 문제만큼 AI가 어떤 판단 기준을 가져야 하는가가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물론 철학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기술의 작동 원리와 데이터에 대한 이해 없이 질문만 잘할 수는 없다. AI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기술·데이터 문해력과 함께 논리적으로 따지고 의심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결국 핵심은 AI에게 일을 얼마나 많이 맡기느냐가 아니다. 어디까지 맡기고 어디서부터 인간이 판단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다. 자료 검색과 비교, 초안 작성은 AI가 잘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문제가 중요한지, 자료를 믿어도 되는지, 그 결과를 현실에 적용해도 되는지는 사람이 판단해야 한다.
철학과의 부활은 과거 학문의 복고가 아닐 수 있다. AI가 인간의 지식을 빠르게 따라오는 시대에 오히려 인간이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 능력이 중요해졌다는 신호일 수 있다.
AI를 잘 쓰는 사람은 AI에게 많이 묻는 사람이 아니다. AI의 답을 다시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다. 철학이 AI 시대에 다시 주목받는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