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세는 한국 주거 시장이 만들어낸 독특한 제도다
. 오랫동안 중산층과 서민의 주거를 떠받쳐온 안전판이다
. 사람들이 전세를 선택한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 우선 월세보다 적은 비용을 들여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전세보증금은 계약이 끝나면 돌려받을 수 있는 돈이지만 월세는 매달 사라지는 비용이다
. 또한 전세는 단순한 임대제도를 넘어 무주택자가 돈을 모아 내 집을 마련할 수 있게 돕는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오랫동안 우리 주택시장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
그런데 최근 정부는 전세대출을 집값 상승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보고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전세대출이 갭투자를 가능하게 했고, 그 결과 매매가격까지 끌어올렸다는 판단이다. 전세제도가 투자에 이용된 사례가 있었던 건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 전세대출 전체를 집값 상승의 주범으로 규정하는 건 지나친 단순화다. 칼이 범죄에 사용됐다고 해서 칼 자체를 없앨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정부 생각과 달리 실제 전세대출의 대부분은 갭투자가 아닌 무주택자의 주거 자금으로 활용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은행권 전세대출 차주의 60% 이상이 2030세대 청년·신혼부부다. 1주택자 대출 요건이 엄격하고 2주택 이상은 전면 금지된 현행 제도상 전세대출의 절대다수가 자금력이 부족한 무주택 실거주자에게 흘러 들어가는 구조다. 이런 통계는 전세제도가 갭투자의 수단보다 서민층의 주거 버팀목 역할을 훨씬 더 크게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세대출을 줄이면 현실적인 선택지는 월세다. 실제 전세가 급격히 줄면서 월세화가 진행 중이다. 연 소득 4000만원 안팎의 청년·신혼부부는 버는 돈의 30% 이상을 매달 주거비로 지출하는 실정이다. 주거비가 늘면서 가계의 소비와 저축 여력은 줄어들고 있다. 청년들은 종잣돈을 모으기 어려워졌고 내 집 마련은 더 멀어져만 간다.
지금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해 있다. 집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세를 월세로 바꾸는 게 맞는지, 국민의 주거 부담을 높이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정책인가 하는 점이다. 집값과 주거비를 같은 개념으로 혼동해선 안 된다. 집값이 다소 안정되더라도 월세 부담이 늘어난다면 국민의 삶은 오히려 더 팍팍해진다.
비단 전세대출뿐 아니라 현 정부 들어 지금까지 내놓은 부동산 대책은 대부분 실패했다는 게 시장의 냉정한 평가다.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시장의 혼선은 가중됐고, 무주택 서민의 주거 사다리를 발로 차버리는 역효과만 낳았다. 원래 목표했던 집값은 되레 뛰었다.
정부의 의도와 반대의 결과를 낳은 원인은 집값 상승의 주범을 다주택자에서 찾은 진단 실패도 있지만, 애초 주거정책의 목표가 틀린 탓이 크다. 주거정책은 국민들이 감당 가능한 수준의 비용으로 거주의 안정을 찾는 것이어야지, 집값 안정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제라도 부동산 정책의 실기를 인정하고 정책의 방향을 전환한다면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다. 임기 내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조급함을 버리고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의 기본 원칙을 되새겨 실질적인 주택 공급을 늘리는 방안부터 고민해야 한다. 정부를 이기는 시장은 없을지 몰라도 시장을 이기는 정부도 없다.
김의중 금융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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