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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게이션)‘비스트’, 감정 씹어 먹은 본능의 이빨
‘살인사건’ 두고 대립하는 두 형사의 감정 충돌 그리고 생존
‘본능’ vs ‘생존’, 두 형사 동력 배치...개연성 배제 대립구조
2019-06-19 13:46:28 2019-06-20 07:42:18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애초부터 비스트는 완벽하고 치밀하고 빈틈 없는 구조를 생각하진 않았다. 사건을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는 해결이란 필요충분조건을 갖춰야 한다. ‘비스트에서 사건의 해결은 필요 조건은커녕 충분한조건도 아니다. 논리가 스며들어 있지도 않다. 거대한 싱크홀에 버금갈 정도로 서사 자체에 구멍이 뚫려 있다. 도대체 스토리를 끌고 가는 캐릭터들의 연기 동력에 관객들이 끌려가질 않는다. 갈갈이 찢겨진 소녀의 시신처럼 시커멓고 흐릿한 안개 속에 감정 덩어리들만이 군데군데 던져져 있다.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구조의 전개 방식은 관객을 사건 한복판으로 끌어 들이지도, 끌어 들이려 하지도 않는다. 이건 비스트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다. 감독은 처음부터 이 지점을 노리고 비스트세계관의 밑그림을 그려나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림을 그리는 도구이다. ‘가학의 수위를 넘어선 고통이다. 보는 관객에 따라선 쉽게 끌려가는 게 아니다. 멱살을 잡힌 채 처참하게 끌려가게 된다. 관점을 교묘하게 이동시키며 이 방식을 관객은 물론 배우들도 느낄 수 없게 감독은 투영시켰다. 그 끝에 남는 건 고통을 느끼는 본능 뿐이다.
 
 
 
비스트는 관계가 만들어 낸 감정의 충돌에 집중한다. 두 형사가 등장한다. 과거 두 사람은 파트너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사연으로 인해 경쟁 관계를 넘어선 적대 관계가 됐다. 인천경찰서 강력반 1팀장 정한수(이성민) 2팀장 한민태(유재명). 두 사람은 성격도 정 반대이다.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만 위험한 담타기를 유지하는 한수. 반대로 원리원칙만을 고집하는 민태. 두 사람은 행방불명 17일째인 여고생 실종 사건을 수사 중이다. 경찰서 전체가 골치를 앓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급작스레 급물살을 탄다. 실종 여고생이 수십 조각으로 토막이 난 채 발견된다.
 
이 지점부터 영화의 관점은 급변한다. 영화 시작과 함께 자욱한 안개 속에 펼쳐진 풍경은 사건을 바라보는 것인지 두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꽉 막혀 있었다. 그 막힘은 엉뚱한 지점에서 물꼬를 튼다. 그리고 트인 물꼬는 예상 밖의 물길로 들이친다. 한수와 민태는 각각 수사 과장 승진을 두고 경찰서 내 다른 세력의 부추김을 받는다. 한수를 미는 수사 과장은 그의 추친력과 소통을 우선시한다. 용의자 수사에서 드러나는 한수의 폭력 성향을 탐탁지 않게 보는 내사과는 민태의 손을 잡는다. 이제 한수와 민태에게 사건 해결은 우선이 아니다. 승진으로 규정된 권력욕에 대한 암투로 변질이 된다.
 
영화 '비스트' 스틸. 사진/NEW
 
사건 전개의 변곡점은 여고생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풀려나면서 추진력을 얻는다. 한수가 잡은 용의자가 사망을 하게 된다. 여기에 한수와의 공조로 감옥에 갔던 마약 브로커 춘배(전혜진)가 출소 며칠을 앞두고 귀휴를 나왔다가 사건을 만들어 버린다. 이 모든 것이 민태의 레이더망에 잡힌다. 물증보단 심증에서 한수의 멱살을 잡게 된 민태이다. 경찰서 내 암투에서 선공을 쥐고 있던 한수의 카드가 급격하게 민태에게로 넘어간다. 코너에 몰린 한수는 춘배의 달콤한 제안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귀휴 기간 동안 자신이 친 사고를 무마해주는 대가로 여고생 살인 사건의 진짜 범인에 대한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겠단 것이다. 자신을 옥죄는 민태를 단 번에 꺾어 버릴 기회이다. 문제는 이 모든 상황을 민태가 눈치채면서부터이다. 여기에 한수 주변의 인물들이 사건의 중심으로 걷잡을 수 없이 스며들게 된다.
 
영화 '비스트' 스틸. 사진/NEW
 
비스트는 프랑스 영화 오르페브르 36번가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기본적인 플롯은 동일하다. 하지만 감정의 골은 더욱 더 깊다 못해 동의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다. ‘동의하기 힘들다의 사전적 의미보단 한수와 민태가 서로를 향해 드러내는 어금니의 원초적 본능이 너무도 강력하다. 영화가 아닌 일상으로 투영시킨다고 해도 두 사람의 대립은 쉽게 납득하기 힘든 지점이 많다. 때문에 비스트는 감정보단 본능이 우선한다. 영화 제목 그대로 두 남자는 끌고 가는 감정을 점차 본능으로 변환시킨다. 한수는 짐승보다 더한 짐승(토막살인범)을 쫓지만 결국 스스로가 짐승이 되는 종국의 파멸을 그리는 도구이다. 실핏줄이 터져 피눈물이 고인 한수의 부릅뜬 두 눈의 본능은 살기자체만 오롯이 남아 버린 비스트그 자체이다. 인간의 언어조차 파멸의 단계에선 짐승의 그것으로 터져 나온다. 한수는 스스로를 갉아 먹은 채 질주의 동력으로 삼아 버렸다. 파멸과 마주한 그 순간 스스로도 쫓았는지 쫓김을 당한 건지를 잊은 채 모든 것을 토해 내버린다. 그는 마지막에 인간의 감정에서 본능의 야수로 돌변했다. 한수의 본질이 야수였음은 스스로도 몰랐고, 민태조차 몰랐다. 한수의 감정을 따라가기엔 관객의 본능은 감정에 더 가까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동의는 될지언정 납득하기엔 불가능하다. ‘짐승보다 못한이란 감정의 질책으로 모든 것을 에두르기엔 한수의 감정은 처음부터 본능에 가까웠다.
 
영화 '비스트' 스틸. 사진/NEW
 
한수가 본능의 야수라면 민태는 생존의 야수이다. 그는 불안하다. 처음부터 불안했다. 한수의 질주가 불안하고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운 것이 불안했다. 그 불안함이 사실 민태를 유지한 힘이다. 눈 앞에 죽음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민태는 살아야 한다. 자신의 목줄을 손에 움켜 쥔 한수의 카드를 잡아내야 한다. 그는 한수를 넘어야 한다. 아니면 자신이 죽는다. 살아야 한단 생존에만 집착하면 모든 본능은 사라지게 된다. 스크린 너머에서 삶을 응시하는 민태의 두 눈은 초점이 없다. 사실 그 초점은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다. 생존이다. 논리는 사라진 상태이다. 살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배제하고 뛰어든다.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또 다른 직진 본능이다. 그래서 한수의 본능에 민태의 본능은 대척점이다. 살기 위함인지 살아 있기에 그런 것인지 모를 한수의 폭발과 살아야 하기에 발톱을 숨기고 웅크린 채 불안함에 떠는 민태의 감정은 완벽하게 서로를 마주한다.
 
영화 '비스트' 스틸. 사진/NEW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감정 속 밑바닥에 자리한 본능에 집중하기에 비스트에는 개연성 자체가 배제된다. 동기조차 불분명하다. ‘비스트는 서사를 따라가는 방식이 아니다. 손으로 이리저리 뭉쳐 집어 던진 본능 자체가 러닝타임 내내 곳곳에 웅크리고 있다. 본능은 감정이 아니다. 이야기도 아니다.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이해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삶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라면 비스트의 화법은 영화가 아닌 현실의 완벽한 투영이란 관점에서 전무후무하다. 반대로 고통만이 현실의 대변이라면 비스트의 세계는 야수의 본능만이 남은 처연함의 조각일 뿐이다. 영화 마지막 한 사람의 흐릿한 표정과 영화 처음 자욱한 안개의 전경이 시나브로 마주하는 모습으로 남게 된다면 그 중간 어디쯤 본인의 감정이 자리할 것이다.
 
영화 '비스트' 스틸. 사진/NEW
 
비스트는 감정이 아니라 본능이다. 그 본능을 통해 따라가다 보면 각자 삶의 색깔이 드러날 뿐이다. 관람이란 측면에서 근래 보기 드문 통증이 밀려온다. 개봉은 6 26.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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