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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게이션)‘천문: 하늘에 묻는다’ 그들이 바라 본 같은 꿈
세종과 그의 평생 지기 장영실, 두 사람의 관계 풀어 낸 상상력
정 반대의 실존 인물 통해 바라 본 그 시절 권력과 사회 부조리
2019-12-18 00:00:00 2019-12-18 00:00:00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가장 높은 곳에 있던 한 남자가 내려다 본다. 가장 낮은 곳에 있던 한 남자가 올려다 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다. 마주보던 두 사람은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세상은 이 두 사람의 시선을 거부한다. 싫어한다. 배척한다. 공격한다. 두 사람은 그저 바라 보고 꿈꾼 것뿐이다. 꿈을 꾼 것이 잘못이란다. 꿈 조차 제대로 꾸지 못했던 시절. 가장 높은 곳에 있던 남자도, 가장 낮은 곳에 있던 남자에게도. 꿈 조차 허락되지 않던 그 시절. 조선은 그랬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조선시대 세종 집권 시기, 군왕 세종(한석규)과 노비 장영실(최민식)의 관계에 대한 얘기다. 두 사람은 조선의 미래를 바라봤다. 사대의 명분이 실리를 앞서가던 시절이다. 그 명분은 군신의 예의도 넘어선다. 민본의 근원도 무시했다. 그래서 가장 높은 곳에 있던 군왕 세종도, 가장 낮은 곳에 있던 노비 장영실에게도 그 시절 조선은 엄혹했다. 그들은 그저 꿈을 꿨고, 그 꿈을 이뤄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도 말이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가 그린 세종과 장영실은 친구다. 군신의 관계였지만, 두 사람은 달랐다. 세종은 장영실에게 군신유의(君臣有義)를 내세우지도 군위신강(君爲臣綱)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실리만을 바라봤다. 신분 체계가 엄격한 사회 구조 속에서도 세종은 노비인 장영실의 실력을 높이 샀다. 노비 신분을 벗게 해주고 그를 등용시켰다. 장영실은 세종을 따랐다.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다. 하지만 그 보답은 시간이 지날수록 보답이 아닌, 관계 속에서 피어 오른 믿음이됐다. 노비 출신에서 종3품 대호군까지 오른 장영실이다. 믿음은 이제 확신이다. 세종의 꿈은 곧 장영실의 꿈이었다. 두 사람은 상국명나라의 시간 대명력을 버리고 조선만의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천문을 연구했다. 조선에서 수백 수천리 떨어진 명나라 시간은 근본적으로 조선의 실정과는 맞지 않았다. 조선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사대의 명분이 분명했던 조선에서 천문은 곧 명나라 황제의 것이었다. 황제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세종은 밀어 붙였고, 장영실은 세종의 손이 됐다. 그들은 천문 연구를 통해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 벌어진 시간의 차이를 계산해 낸다. 이제 조선은 조선만의 시간을 갖게 됐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하지만 그 시절 시간은 절대자의 권력을 상징했다.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던 제후국조선의 왕 세종은 신하일 뿐이다. 신하가 황제의 것을 탐했다. 명나라가 반발했다. 조선의 양반들도 반발했다. 세종은 공격을 받는다. 장영실은 졸지에 역적이 됐다. 세종은 장영실을 보호해야 한다. 자신의 꿈이자 같은 곳을 바라보는 유일한 지기다. 하지만 지켜낼 힘이 없다. 신하들인 양반들조차 세종을 공격한다. 장영실을 내주고 사대의 명분 속에서 조선의 근간을 유지시켜야 한다고 압박한다. 명나라 사신 앞에서 세종은 모든 것을 불태운다. 장영실과 함께 세우고 만들고 지켜냈던 조선의 시간을 모두 붙태운다. 장영실은 그렇게 세종에게 버림을 받는다. 버린 것인지 버릴 수 밖에 없던 것인지 모르겠다. 급기야 세종이 타던 가마 안여가 부서지면서 세종이 크게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 시절 군왕의 탈것이 부서지고 사고가 났다. 대역죄이자 반역죄다. 이제 안여 수리 담당관인 장영실 앞에는 죽음만이 똬리를 틀고 있을 뿐이다. 세종은 장영실을 죽여야만 한다. 장영실은 죽었을까. 장영실은 세종에게 버림을 받았을까.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꿈을 꿨던 평생의 지기였던 두 사람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장영실은 실제 역사에 존재했던 실존 인물이다. 노비였기에 출생 시기는 짐작만 할 뿐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이 단 두 줄의 기록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던 군왕 세종은 어떻게 가장 낮은 곳에 있던 노비 장영실과 그 시절 세상을 바꿀 꿈을 함께 꿨을까.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충무로 멜로 장인 허진호 감독의 손에 의해 탄생됐다. 허 감독은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를 우정 그 이상으로 그려냈다. 죽음 직전에 떠올릴 법한 한 사람이 누굴까. 세종에겐 장영실이었고, 장영실에겐 세종이 아니었을까. 상상력이 더해진다. 이건 상상력이다. 하지만 합리적인 상상력이다. 두 사람의 영화 속 모습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췄고, 그 설득력은 공감을 끌어 내며 공감은 장면을 만들어 냈다. 그 장면 속에 배우 한석규 최민식이 있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한석규가 만들어 낸 세종은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속 세종 이도가 아니다. 고뇌하고 고민하고 탐구하고 생각하는 인간적인 군왕이다. 그 안에서 세상을 바꾸고자 접근하지만 파격이 아닌 실리 안에서 설득하려 든다. 그래서 시절의 분위기와 맞물리며 실존적 군왕으로서 다가오게 된다. 최민식의 장영실 역시 인간이다. 민본주의의 근간은 백성이다. 백성이 주인인 나라의 근간은 군왕정치 시대의 조선이 아닌 지금의 민주주의의 뿌리와도 같다. 반상의 법도와 군왕이 존재하던 조선의 시간 속에서 노비 장영실이 인간으로서 발돋움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권력의 정점에 선 군왕이 내민 손길이다. 권력은 시절의 얼굴이고, 웃음이고, 눈물이고 아픔이란 단어로 해석하자면 세종의 모든 것이 바로 장영실이었고, 장영실의 모든 것이 세종이었단 감독의 시선이 올곧게 다가온다.
 
두 사람의 시대와 법칙을 넘어선 관계만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은 아니다. 군왕정치와 함께 당파정치가 시작된 조선의 시간은 앞서 언급된 실리가 아닌 명분의 시대를 말한다. 정치의 주고 받음이 이 영화의 근간이자 뼈대인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 위로 살을 붙이며 또 다른 곁가지를 만들어 낸다. 여기에 기승전결의 흐름을 담당하는 스토리의 굴곡이 안여사건이란 장치를 통해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 내면서 장르의 힘을 강하게 때린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사극은 기본적으로 혹시란 가정으로 출발해 역시란 단정으로 마무리를 할 때 힘을 얻게 된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역설적으로 역시란 단정으로 시작해 혹시란 가정으로 끝을 맺는다. 익숙한 시작이지만 이질적인 과정으로 모든 것을 끌고 간다. 낯이 익지만 또 낯이 선다. 그래서 긴장감이 흐를 수도 있지만 긴장감이 깨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깨고 들어간다면 연기 장인과 연출 장인이 만들어 낸 화려한 심포니의 시대극 한 판을 오롯이 감상하고 즐기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개봉은 12 26.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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