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바위그림)카렐리야의 거울, 오네가호수에서 만난 풍경
(백야의 땅, 박성현의 바위그림 시간여행-②)
2023-11-13 06:00:00 2023-11-13 12:04:32
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오네가호수 위치. 이미지=박성현
  
오네가호수로 가는 첫 관문, 시외버스를 타다
  
페트로자보츠크 향토박물관에서의 짧은 예습을 마치고 드디어 자연 속 실물을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기차역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오네가호수로 가려면 먼저 근처의 작은 도시인 푸도시로 가야 하는데 기차는 없고 버스를 기차역 앞에서 타야 한다. 필자의 이동 경로처럼 모스크바에서 기차로 페트로자보츠크를 거쳐 버스를 타도 되고, 아니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푸도시행 버스를 탈 수도 있다.
 
이번에 시외버스를 타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버스 화물칸에 짐을 실을 경우 개당 비용을 따로 지불해야 한다. 창구에서 버스표를 구입할 때 짐표도 사야 하는 것이다. 현장에서 버스표를 사려고 기다리다가 좌석이 없으면 낭패기 때문에 나는 러시아 친구의 도움으로 미리 인터넷 예매를 했었고 짐표를 갖고 있지 않았다. 좁은 버스에서 5시간 넘게 배낭을 안고 갈 수는 없어 두 개의 짐을 이미 화물칸에 넣어둔 상태였다. “현금은 안 받아요.” 화물비를 현금으로 내미니 검표원이 거절한다. 버스는 곧 출발하는데 짐표를 사기 위해 새로 줄을 설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난감했다. “인터넷은행 카드는 되나요?” , 된단다! 해외카드를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러시아 인터넷은행 계좌를 만든 것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기록이 남지 않는 현금을 거부하고 짐표나 카드, 계좌이체로 처리한다는 것은 확실히 혼란의 90년대 러시아와는 달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뜻이다.
 
 
버스의 차창 밖 풍경, 메드베지예고르스크. 사진=박성현
  
푸도시로 가는 내내 버스의 차창 밖으로 나무숲이 끊임없이 스쳐 지나간다. 하늘은 호수처럼 맑았다가 먹구름이 끼고 어느새 흰 구름과 힘겨루기를 한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개었다가를 반복하니 이후 오네가호수에서 겪게 될 변화무쌍한 날씨의 전조였을지도 모르겠다. 도중에 휴식을 위해 버스가 정차한 메드베지예고르스크의 정거장은 딱히 휴게소라기보다 간단히 요기할 빵을 사거나 화장실을 다녀올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이 오네가호수의 북쪽이니 버스는 호수의 서쪽인 페트로자보츠크를 출발해 빙 둘러서 목적지인 호수 동쪽의 푸도시로 가는 셈이다.
 
푸도시 향토박물관에서검은 강으로
 
페트로자보츠크 기차역 앞에서 낮 3 30분에 출발한 버스는 밤 9시에 푸도시에 도착했다. 호스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푸도시 역사·향토박물관을 방문했다. 암각화 답사 일정에 따라 한국에서 미리 여러 박물관들과 접촉했었는데, 이 박물관의 경우 여러 날 머물러야 하는 내 답사를 도울 수는 없지만 숙소를 소개해 주었고 나는 직접 들러 감사 인사를 할 작정이었다. 오네가호수를 방문하는 러시아인들도 푸도시 박물관을 통해 숙박 정보를 얻거나 그룹일 경우 짧은 암각화 투어를 신청할 수 있다.
 
 
푸도시 역사향토박물관 입구의 모캐 동상. 사진=박성현
  
푸도시 시립박물관은 작지만 이 지역 옛사람들의 생활과 문화를 아늑하게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이다. 복도 초입에 물고기 동상이 서 있는데 푸도시의 대표 어종인 모캐(대구과의 민물고기). 이 물고기가 여기서 엄청나게 잡혀 가장 배고픈 시기에 푸도시 사람들을 도왔다고 전해진다. 모캐 신사는 주머니와 사슬이 달린 상인 조끼를 입고 지팡이를 쥔 채 푸도시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모자를 벗어 관람객들에게 인사한다. 그 아래에는 러시아 상인들의 모토가 쓰여 있다. “이익이 먼저다. 하지만 명예가 이익보다 먼저다.”
 
전시실의 흑백 사진 속에는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소년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나무배와 그 앞에 도열한 각종 사모바르(러시아 전통 주전자)들도 어민들의 삶을 느끼게 한다. 한쪽 벽에는 오네가 암각화를 모티프로 한 어린이들의 그림과 공예품이 전시돼 있다. 페트로자보츠크에서 본 오네가 암각화 바위조각 세 개 중 두 개가 처음에 옮겨졌던 장소도 이곳이다. 규정에 따라 이후 국립박물관이 있는 페트로자보츠크로 다시 이전되었지만.
 
푸도시 역사향토박물관 입구의 모캐 동상을 소개하는 오니스케비치 박물관장(우)과 직원 옐레나 씨(좌). 사진=박성현
  
이메일을 주고받았던 박물관 직원 옐레나 씨가 안내를 하다가 옛날 다림질 방식을 보여 주는데, 방망이 같은 것에 천을 감아 좀 더 넓적한 다른 방망이로 밀가루 반죽을 밀듯이 밀기 시작한다. 카렐리야 옛사람들 나름의 다듬이질을 보는 것 같아 흥미롭다. 이곳은 페트로자보츠크 박물관에 비해 매우 소박한 규모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전시 내용과 박물관의 분위기가 정감 있게 다가온다. 박물관 직원들의 환대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안내를 마치고 옐레나 씨는 택시까지 잡아주었는데, 내가 걱정되었는지 택시 번호를 수첩에 적더니 도착하면 전화하라고 당부한다. 나의 목적은 암각화지만 모든 여정에서 그렇듯이 사람들과의 만남은 항상 경이로운 감동을 준다. 푸도시에서 다시 택시를 달려 11시경 약속 장소인 카르셰보 마을의 작은 나루터에 도착하니 오네가호수로 데려다 줄 모터보트가 다가온다. 선장인 안톤 씨와 그의 아홉 살 된 딸 아미나가 타고 있다.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검은 작은 강이란 뜻의초르나야 레치카를 따라 물살을 헤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오네가호수를 마주하다
 
배의 모터 소리는 분명 소음을 일으키는데, 강물을 따라 흐르는 나무들과 풀이 물 위로 내려앉는 하늘과 흰 구름에 어우러져 고요를 자아낸다. 검은빛을 띤 작은 강은 낯선 방문자를 침착하게 심연의 시간으로 이끄는 듯하다. 오네가호수로 다가가고 있음이 느껴진다. 이 강은 오네가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많은 강들 중 하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빠를 따라 이 강을 오르내리는 소녀 아미나가 의젓하게 앉아 있다가 말했다.
 
호숫가 캠프로 안내하는 안톤 씨와 딸 아미나. 사진=박성현
 
“저는 여기가 정말 좋아요.”
 
카렐리야는 숲과 호수의 땅이다. 오네가호수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담수호로 그 면적이 9,720km², 즉 서울의 16배 정도가 되며 호수의 80%는 카렐리야 공화국에 위치해 있다. 유럽에서 제일 큰 호수인 라도가호도 카렐리야 공화국과 레닌그라드주에 걸쳐 있는데, 이 둘은 자매로 불린다. 두 호수 모두 약 12,000년 전 최종 빙기의 빙하가 녹으면서 만들어졌다. 빙하기 이전 시대의 지각 단층과 이동으로 인해 형성된 거대한 구덩이들을 녹은 빙하가 물로 채우면서 크고 작은 호수들이 생겨났고, 오네가와 라도가 자매도 그렇게 탄생했다.
 
40분가량을 달려서 드디어베소프노스. 안톤네라 불리는 캠프에 도착했다. 베소프노스는 오네가호수의 대표적 암각화가 있는 지점으로 악마의(베소프) (노스)이라는 뜻이다. ‘노스는 원래를 의미하지만 곶이 코 모양이라서 곶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이곳은 우리가 타고 온 강인 초르나야 레치카의 하구로 광대한 오네가호수를 마주 바라보고 있다. 베소프노스를 비롯한 주요 암각화 지점으로 가기 위해서는 100미터가 채 안 돼 보이는 강물을 작은 배로 건너면 된다. 워낙 짧은 거리라 소리를 지르면 건너편에서 들릴 정도다. 암각화를 둘러보기 위해 머문다면 위와 같은 경로를 거쳐 이곳으로 오거나, 카르셰보 마을 대신 샬스키 마을로 이동해 배를 타고 암각화 지점들을 찾아갈 수 있다. 두 마을 모두 버스는 없어서 택시로 가야 한다. 샬스키 마을은 오네가호수 암각화 중 코치콥나볼록이라는 지점과 가깝다. 하지만 주요 이미지들이 모여 있는 베소프노스나 페리노스 지점까지는 배를 타고 한참 가야 하기 때문에 어느 지점을 중심으로 할 것인가에 따라 머물 곳을 결정하는 편이 좋다.
 
오네가호수를 마주 보는 야영지의 텐트들. 사진=박성현
 
캠프에 들어서니 미리 온 손님들이 친 텐트들이 여기저기 서 있고 실내 숙소 몇 동도 가족 손님들로 꽉 차 있다. 카렐리야는 아름다운 경치뿐만 아니라 낚시에 최적화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어 러시아인들이 즐겨 찾는 여름철 휴가지다. 예전에는 인접한 북유럽 국가를 비롯해 외국인 여행자들도 종종 이곳을 찾았다는데, 지금은 전쟁 중이라 러시아인들만 보인다. 전문 야영객들의 크고 튼튼한 텐트들 사이로 내가 가져온 작고 검은 텐트도 숲속에 세워졌다. 땅은 촉촉하게 젖어 있고 흙은 부드럽다. 호숫가에는 붉은빛과 검은빛이 섞인 긴 모래밭이 펼쳐져 있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햇빛에 일렁이는 오네가호수를 마주 보았다. 이제 그들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처음 마주한 오네가 호수. 사진=박성현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perceptio@hanmail.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