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당국이 연일 '생산적 금융'을 외친다. 산업과 혁신에 돈이 흐르도록 하겠다는 것이지만, 여전히 은행 대출과 자산의 상당 부분은 부동산으로 쏠려 있다. 금융시스템이 생산적 자금 흐름으로 바뀌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시장의 관성 때문만이 아니다. 부동산 자금은 '안전한 돈'이라는 인식이 배경에 깔려 있다.
한국 금융의 뿌리에는 안전한 대출 중심 구조가 있다. 은행의 수익모델은 이자마진에 기반하고, 담보가 있어야만 돈을 빌려준다. 반면 제조업 연구개발(R&D)이나 신산업 투자는 담보가 없고 회수 기간이 길다.
실제로 은행권 대출 포트폴리오를 보면, 기업대출 중 절반 이상이 부동산 담보 관련 대출로 구성돼 있다. 중소기업대출도 상당수가 부동산 담보 기반 운영자금으로 쓰인다. 겉으로는 생산적 대출처럼 보이지만, 내용은 여전히 부동산 중심인 셈이다. 결국 위험 대비 수익이 불확실한 영역엔 돈이 돌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금융기관의 성과 평가 체계에서 비롯된다. 우리나라 은행 등 금융기관의 성과 평가 체계는 '안정성 지표'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쉽게 말해 창업 기업에 돈을 빌려줬다가 부실이 발생하면 실패로 기록되지만, 부동산 담보대출은 건전한 영업으로 평가된다.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아무리 생산적 금융을 외쳐도 은행은 절대 리스크가 큰 산업투자에 나서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정책의 신뢰다. 금융당국 수장들이 부동산 자산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부동산 쏠림을 막자", "생산적 금융으로 전환하자"고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들은 안전자산인 부동산에 자금을 쏟는다. 국민에게는 가계부채가 위험수위라며 금융당국은 연일 주택담보대출을 조이고 있다.
실수요자 대출 문턱은 높아지고, 무주택 서민은 대출 규제 벽에 가로막혀 내 집 마련 꿈을 접는다. 이찬진 금감원장은 최근 국회 국정감사에서 강남 아파트 두 채 보유 논란에 대해 "눈높이 맞지 않는 부분은 한두 달 내에 정리하겠다"고 했다. '정리하겠다'는 게 자녀에게 '증여하겠다'는 얘기였다. 부동산을 팔아 시장 메시지를 바로잡기보다 가족에게 넘겨 여전히 자산을 유지하겠다는 의미로 들린다. 국민은 허탈하다.
금융 수장들이 "부동산 쏠림을 경계하라"며 서민에게는 금융 절제를 설파하면서 정작 본인은 강남 재산을 대물림하는 내로남불에 국민들은 속에서 천불이 날 지경이다. 국토부 차관이 "집값 떨어질 때 사라"며 타이밍 투자를 조언하는 모습은 국민에게 조롱으로 들린다. 10·15 대책을 주도한 공직자들의 갭투자 의혹이나 다주택에 더해 영끌로 강남 아파트를 매수한 사례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이런 장면들이 반복되면 국민의 정책 신뢰는 무너진다. '생산적 금융'이라는 구호가 아무리 그럴듯해도 정책을 설계하는 이들이 스스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
'생산적 금융'은 국민에게만 강요할 일이 아니다. 대출을 조일 때마다 고통 받는 것은 서민이다. 집 한 채 마련조차 어려운 청년, 자녀 교육을 위해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중산층이 희생당한다. 국민이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 어떤 금융정책도 신뢰받을 수 없다. '말'은 금융 개혁을 외치면서 '발'은 강남 부동산으로 향하는 한, 한국 금융의 도덕적 기반은 다시 세워질 수 없다.
임유진 금융팀장 limyang8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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