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가을의 향을 담다: 제철 과일로 빚은 한국 와인 이야기
2025-10-29 06:00:00 2025-10-29 06:00:00
예부터 가을은 단순히 한 계절의 의미를 넘어선다. 이 계절은 각종 농산물을 거두며 먹거리가 풍성해지는 시기다. 추석을 앞뒤로 쌀을 포함해 사과, 배, 포도, 복숭아 등 다양한 결실이 한창 수확된다. 제철 과일은 당도가 높고 향미가 뛰어나 생과로 즐기기에도 좋다. 
 
하지만 온실 재배와 수입 과일의 확산으로 ‘제철 과일’이라는 말이 점점 무색해지고 있다. 더욱이 제철 과일의 소비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사과, 배, 감귤, 단감, 포도, 복숭아 등 국내 6대 제철 과일의 1인당 소비량은 2014년 41.4㎏에서 2022년 36.4㎏으로 줄었다. 
 
반면 수입 과일의 소비량은 꾸준히 높아져 이미 12.6㎏에 이르고 있다. 먹거리가 다양해지고 수입 과일이 늘면서 국내 과일 산업 자체가 위축되고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과일을 이용한 음료나 건조칩 등 가공품이 생산되고 있지만, 높은 가격과 가공용 품종 부재로 시장 반응은 제한적이다. 그러나 부가가치가 높고 최근 소비자들의 관심이 늘고 있는 가공품이 있다. 바로 ‘한국 와인’이다. 
 
사실 ‘한국 와인’은 법적인 용어는 아니다. 우리나라 주세법상으로는 과실주에 해당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우리 땅에서 자란 과일을 발효해 만든 술을 뜻한다. 이는 전통적인 포도 와인에 국한되지 않고 사과, 복숭아, 오미자, 자두, 참다래 등 다양한 과일로 확장된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와인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 같은 다양성 덕분이다. 물론 현재 한국 와인의 대표 주자는 포도다. 
 
한동안 국산 포도로 만든 와인은 ‘식용 포도라 품질이 떨어진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꾸준한 연구와 양조 기술의 발전이 이러한 편견을 깨뜨렸다. 수분을 줄여 당도를 높이는 기술, 수확 시기를 조절해 풍미를 강화하는 방법, 그리고 유럽 양조용 품종을 도입한 재배 시도들이 결실을 보았다. 
 
특히 ‘캠벨 포도 와인’은 한국 소비자에게 익숙한 맛과 향으로 친근하게 다가서며 국제 품평회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머스캣 베일리 A, 산머루, 그리고 토종 화이트 품종인 ‘청수’까지 더해지며 한국 포도 와인의 스펙트럼은 한층 넓어졌다. 이 가운데 ‘청수’ 품종은 국내 주요 양조장들이 앞다투어 사용하는 대표 화이트 와인용 포도로 자리 잡았다. 
 
포도 말고도 다른 과일을 이용한 한국 와인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사과 와인이다. 사과 재배 면적이 넓다 보니 사과 와인이나 사과 사이더 형태의 술을 만드는 양조장도 많다. 한 양조장은 사과를 한 달 동안 저온 발효한 뒤 15도에서 1년간 숙성해 사과 와인을 완성한다. 캐나다 아이스와인을 벤치마킹해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사과 향을 가득 담아낸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과일 와인의 역사는 사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해방 이후 처음 생산된 과일 와인은 포도가 아닌 1969년의 ‘애플 와인’이었다. 당시 정부는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쌀로 만든 술보다 과일로 만든 술을 장려했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사과가 처음으로 선택된 것이다. 
 
복숭아로 만든 와인도 있다. 복숭아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널리 재배되는 과일인데, 풍부한 과즙과 특유의 향 때문에 와인으로 만들었을 때도 매력적인 풍미를 발휘한다. 초기에는 경북, 충남, 전남 등 복숭아 주산지를 중심으로 소규모로 생산되었지만 최근에는 원료 수급과 가공 기술의 발달로 산지와 무관하게 다양한 양조장에서 독창적인 복숭아 와인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품종 선택과 블렌딩이 중요한데, 천도복숭아는 산미와 향이 뚜렷해 와인의 구조감을 살려주고, 백도는 부드럽고 은은한 단맛으로 전체적인 맛의 균형을 맞춰준다. 두 품종을 적절히 섞으면 산도와 당도의 조화가 뛰어나 소비자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복숭아 와인이 완성된다. 
 
특이한 원료로 만든 와인도 있다. 바로 오미자 와인이다. 일반적으로 오미자는 한약재로 알려져 있지만 나무에서 수확한 오미자는 분명 과일이다. 오미자는 신맛, 단맛, 쓴맛, 짠맛, 매운맛 등 다섯 가지 맛이 어우러져 이름 붙여진 과일이다. 이를 활용한 와인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개성을 지닌다. 특히 오미자 스파클링와인은 프랑스 샴페인 방식으로 만들어져 다양한 꽃 향이 풍부하게 퍼지고 산미와 탄산이 어우러진 깔끔한 맛을 선사한다. 
 
이 밖에도 참다래(키위), 딸기, 매실, 모과, 살구 등 한국 농가에서 재배한 과일을 기반으로 한 와인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과거의 ‘달기만 하고 향이 부족하다’는 평가에서 벗어나 이제는 맛과 향 모두에서 충분히 품질을 논할 수 있을 수준에 도달했다. 물론 포도로 만든 외국의 와인과는 다른 형태의 와인이다. 그러기에 외국 포도 와인과 직접적인 비교를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우리 과일의 특징을 충분히 살려서 만들었기에 익숙한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는 과일 술이다. 
 
중요한 점은 한국 와인은 대부분 양조장에서 직접 재배한 과일이나 지역 농산물을 활용하기 때문에 지역 농업과의 상생에 이바지할 수 있다. 또한 한국 와인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한식과의 조화다. 오랜 시간 한국의 밥상과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연구 개발됐기에 한식과 곁들였을 때 그 매력이 배가된다. 
 
가을은 한국 와인을 즐기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달콤하고 새콤한 가장 맛있다고 할 수 있는 제철 과일의 풍미가 와인 속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와인을 선택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 잔의 술을 즐기는 것을 넘어 지역 농업을 응원하고, 한식과 어울리는 새로운 미식 문화를 경험하며, 한국 과일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일과도 맞닿아 있다. 올가을, 제철 과일의 향을 담은 한국 와인 한 잔을 선택한다면 가을의 정취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이대형 경기도농업기술원 지방농업연구사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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