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논마다 황금빛으로 물든 벼가 고개를 숙이고, 들녘에서는 한 해 농부의 땀이 결실을 본다. 우리의 많은 농산물 중에서도 쌀이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과거 쌀은 농업의 근간이자 식생활의 중심이었다. ‘식(食)’에서 주식으로 자리 잡은 만큼, 다른 농산물보다 상징성과 중요도가 높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었다. 지난 가을 수확한 쌀이 바닥나고, 보리가 여물지 않은 5~6월(음력 4~5월) 사이, 농가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일컫는 말이다. 당시에는 ‘쌀밥을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먹거리가 풍족해진 시대, 쌀은 오히려 남아돌고 있다.
올해 국가데이터처(옛 통계청)가 발표한 ‘2025년산 쌀 예상 생산량’은 약 353만9000톤이다. 재배면적이 전년보다 67만ha 줄었지만,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늘어 전체 생산량 감소 폭은 4만6000톤에 그쳤다. 문제는 소비다. 밥쌀 소비 감소와 가공용 소비 증가를 고려하더라도 예상 과잉 물량은 약 13만톤에 달한다. 생산량은 평년 수준을 유지하지만, 소비 둔화로 재고 누적과 가격 불안정이 계속되고 있다. 쌀 소비량 감소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국가데이터처 자료에 따르면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2014년 65.1kg에서 2024년 55.8kg으로 10kg 가까이 줄었다. 1980년대 초반 130kg 수준과 비교하면 절반에도 못 미친다. 정부는 잉여 쌀 매입, 가공용 쌀 확대, 논 타작물 재배 전환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 중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결국 ‘소비 확대’에 달려 있다.
그러나 풍요의 시대에 쌀 소비를 늘리는 일은 쉽지 않다. 젊은 세대의 식탁은 이미 ‘밥보다 빵’, ‘간편식’, ‘탄수화물 기피’로 대변된다. 포만감보다는 간편함을, 전통의 맛보다는 새로운 식문화를 선호하는 흐름 속에서 쌀의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정부와 업계는 쌀을 이용한 면류나 떡류 개발로 활로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밥의 연장선’이다. 가정의 한 끼를 대체하는 수준의 소비로는 근본적인 변화가 어렵다. 이제는 새로운 형태로 쌀을 즐길 수 있는 소비 형태를 만들어야 한다.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전통주다. 최근 전통주는 MZ세대의 새로운 주류 문화로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과일 향을 입힌 저도주, 디자인과 스토리텔링을 강화한 트렌디한 제품이 등장하면서, 중장년층 중심이던 소비층이 2030세대로 확산하고 있다.
전통주는 지역의 쌀과 농산물을 원료로 쓴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농업 기반 산업’이다. 지난해 12월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우리쌀·우리술 K-라이스페스타'에서 한 관람객이 우리 쌀로 만든 전통주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전통주 소비가 늘어나면 쌀 소비도 자연스럽게 증가한다. 술 제조에는 다른 쌀 가공식품보다 훨씬 많은 양의 쌀이 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17년 안동시 조사에 따르면, 지역 내 7개 양조장이 연간 소비하는 쌀의 양은 약 570톤으로, 안동 지역 전체 쌀 소비량(1만 540톤)의 5.4%에 해당한다. 또 우리나라 희석식 소주 시장의 10%만 국산 농산물로 전환해도 매년 3만6000톤의 쌀을 더 소비할 수 있다. 중견 막걸리 양조장의 경우, 쌀 400kg을 넣는 탱크를 하루 4회 가동하면 한 달 40톤, 연간 480톤의 쌀을 소비한다. 4인 가족 기준으로 약 2000가구가 1년 동안 먹을 양에 해당하는 규모다.
쌀 소비는 양조장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최근에는 집에서 직접 술을 빚는 ‘가양주’ 문화가 확산하며 새로운 소비층이 되고 있다. 전국에는 정부 지정 전통주 교육기관이 23곳(2025년 11월 기준) 있으며, 비지정 교육기관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한 교육기관이 20명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1인당 5kg의 쌀을 사용한다고 가정하면, 1회당 100kg, 8주 과정으로 800kg의 쌀이 소비된다. 실제로 가양주 애호가 중 일부는 한 달에 50kg, 연간 800~900kg의 쌀을 쓰기도 한다.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55.8kg인 점을 생각하면 상당한 수치다.
전통주는 본질적으로 ‘농업 기반 산업’이다. 지역의 쌀과 농산물을 원료로 사용하며, 수입 농산물을 쓰는 일반 가공식품과 달리 법적으로 국내산만을 써야 한다. 즉, 전통주 소비가 국산 농산물 소비이자, 지역 농가의 소득 증대로 이어진다. 가을 들녘의 벼는 단순한 곡식이 아니다. 그 안에는 농부의 땀, 지역의 문화, 그리고 우리의 식문화가 담겨 있다. 전통주 한 잔을 마실 때, 그 속에 담긴 들녘의 수고와 지역의 가치를 함께 떠올려보자. 그것이 곧 우리의 쌀을 살리고, 농업의 지속 가능한 길을 여는 작은 선택이 될 것이다.
이대형 경기도농업기술원 지방농업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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