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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미국의 보수와 한국의 보수
2016-03-08 06:00:00 2016-03-08 06:00:00

 

최강욱 법무법인 '청맥' 변호사
외신까지 달군 야당의 필리버스터(filibuster)에도 불구하고 테러방지법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유신으로 사라졌다 박근혜의 새누리당이 부활시킨 제도는 국민에게 의회주의에 관한 새로운 경험을 선물했다. 국회 본회의장을 방청하려는 시민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국회방송이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올렸다. 24시간 불이 켜진 의사당을 두고 “국회가 마비되었다”고 주장한 여당은 체면을 구겼다.   

 

필리버스터라는 말은 18세기 카리브 해적을 가리키는 네덜란드어(vrijbuiter)로 탄생해 프랑스(flibustier)와 스페인(filibustero)을 거쳐 1851년경 미국 상원에 정착했다고 한다. 애초 미국에선 연방정부를 전복하고자 하던 남부 모험가들을 이르는 말이었으나, 토론을 전횡하는 방식이 이와 같다고 여겨 의사진행 방해를 이르는 말이 된 것이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은 해질녘까지 모든 일이 끝나야 한다는 규칙을 두고 있었기에, 카이사르의 정적 카토(Cato)는 하루 종일 연설을 하며 의결을 저지해 카이사르의 원망을 샀다. 이처럼 예로부터 지금까지 민주주의의 역사와 필리버스터는 결코 떼놓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미국 의회에선 매우 익숙한 풍경이고, 대통령제가 아닌 영국·프랑스·캐나다 등에서도 종종 벌어진다. 비록 우리 대통령은 여러 차례 책상을 내리치며 분통을 터뜨렸다지만.

 

우리 테러방지법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것은 9·11 테러 이후 2006년 미국 부시정권이 제정한 ‘애국자법’(PATRIOT Act)이다. 그에 따라 미 국가안보국(NSA)은 미국 시민 수백만 명의 통신기록을 한꺼번에 수집해 5년간 보관할 수 있었다.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의 용기 있는 폭로로 드러난 것처럼, 이는 시민사회의 개방성과 자유로운 공기를 억압하였기에 부시정권 이후의 미국을 ‘이류국가’로 평가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 법의 개정을 막으려던 공화당은 상원에서 랜드 폴이 앞장서 필리버스터를 구사했지만 여론의 역풍을 맞았고, 법은 결국 2015. 6. 2. ‘미국자유법’(USA Freedom Act)의 통과로 폐기되었다. 우리는 필리버스터에도 불구하고 법이 제정되었지만, 미국은 필리버스터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법이 사라진 것이다. 이토록 상반된 현실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미국에 가서 큰절을 하고, 주한미군 사령관을 ‘강제로’ 업어주는 실례를 감행하며 기회가 될 때마다 미국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되뇌이는 대한민국의 집권세력은 막상 필리버스터와 테러방지법에서는 미국과 정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그렇다면 선거에 나선 후보를 보는 눈은 어떨까?

 

경선의 주요 고비라는 슈퍼화요일에서도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낙승을 거두자,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히틀러를 떠올리며 경악하고 있다. 안네 프랑크의 이복자매인 에바 슐로스(87)가 뉴스위크에 쓴 기고문을 필두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페루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79)도 '광대', '인종 차별주의자' 등의 표현을 써가며 트럼프를 거침없이 비판했다. 경선 경쟁자였던 젭 부시의 선거 캠프 고문인 맥스 부트는 트럼프를 '파시스트'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지난해 말 트럼프와 히틀러를 직접 비교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최근 구글 검색어 분석을 통해 미국시민들의 캐나다 이민 문의가 폭주한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그 뿐인가, 미국의 인기 연예인 마일리 사이러스(23)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을 떠나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더 놀라운 것은 같은 정파에서도 깊은 탄식과 매서운 비판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공화당 주류는 물론, 심지어 네오콘에서도 “차라리 민주당의 힐러리를 찍어 나라라도 건지자”는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2002년 공화당 대선후보를 지낸 밋 롬니가 트럼프를 가리켜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는 가짜, 사기꾼”이라고 앞장서자, 2008년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존 매케인,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도 롬니의 견해를 지지했다. 이어 연방의원을 포함해 수십명의 공화당 주요 인사들도 트럼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악명 높은 백인우월주의 단체 KKK는 공개적으로 트럼프를 지지하며 선거를 돕는다.

 

과연 우리는 어떨까.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방해하는데 앞장서며, 국정원의 사찰 권한을 키워주고선 앞 다투어 텔레그램에 가입한 정치인들은 선거과정에서 언론과 유권자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을까? 자나 깨나 나라 걱정이라는 우리의 자칭 ‘애국세력’과 ‘보수주의자’들의 눈은 KKK와 같을까, 롬니와 같을까? 친미를 앞세우는 그들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과연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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