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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31화)철로에 서린 애환
“그렇게 열차가 떠나고 들어오지만”
2016-08-29 06:00:00 2016-08-29 06:00:00
노동부가 취합한 산재통계자료에 의하면, 2001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의 산재사망은 3만3천902명이고, 연 평균 2422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함으로써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들 중 한국은 산재사망률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철도 쪽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철도 관련 산재의 원인을 보면, 철도민영화를 위한 사전단계로 1996년 이래 진행되었던 수천 명의 인력감축과 그로 인한 과로노동자들의 사고, 외주화, 노후차량, 1인승무제 문제 등이 있다. 한국의 철도는 산재사망과 피난열차의 철로가 되기도 했지만, 그 시작점에는 근대화를 위해 철도건설을 꿈꾸었던 사람도 있다.
 
철도건설에의 열정, 박기종(1839~1907)
한국 철도사를 보면 경인선(노량진~제물포, 1899년 완성), 경부선(서울~부산, 1905년 1월 1일 완성)에 이어 1906년 경의선이 완성되는데, 경의선은 기실 1905년 4월 28일부터 서울~신의주 간 연락운전을 개시하여 당시 러·일 전쟁 중이던 일본이 자국에서 만주까지 군수물자수송을 하는데 이용한 군용철도이다. 한국 최초의 철도들은 이렇듯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의 일환으로 일제에 의해 건설되었으나, 철도라는 새로운 운송수단이 근대화를 촉진시킬 것임을 알았던 조선의 한 인물이 오롯이 민족자본으로 건설하고자 고군분투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가 바로 <만인보>가 노래하는 박기종이다.
 
이루지 못한 꿈이 더 아름다운 날이다
 
부산 태종대 상놈 박기종
태종대 벼랑
파도소리 들으며 철이 들었다
잿빛 불빛 수평선 바라보며
뜻을 품었다
부산은 농사짓는 곳이 아니다
장사하는 곳임을
일찍 깨달았다
 
어린아이가
건어물을 팔고
일본 어망을 사들였다
연상의 일본 장사꾼과 사귀어
일본말을 척척 말했다
오겡끼데스까
척척 말했다
 
일본사찰단 역관이 되어
일본에서 철도를 보고 왔다
그로부터 평생을 철도의 꿈이었다
첫 번째
부산 하단 사이
부설자금 미달로 실패했다
두번째
경원선
함경선의 큰 꿈
일본의 방해공작 산 넘어 산
세번째
삼랑진 마산 사이
부설권을 획득했으나
일본의 방해공작 물 건너 물
 
내 나라의 철도는
남의 손에 맡겨서는 안된다 외쳤다
연이은 실패에도 그 억센 꿈 대를 이어갔다
< … >
가는귀먹어
일본놈들이 부설한 경부선 밤 기적소리가 멀리 들려왔다
(‘박기종’, 18권)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외촌리에 소재한 철원역은 적벽돌을 쌓아 만든 2층건물로, 경원선(서울용산-원산간,223.7km)의 중간역이자, 금강산전기철도(철원-창도-내금강 116.6km)의 시발역이다. 사진/뉴시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조선은 일본의 요청에 따라 제1차 수신사(김기수)를 파견하는데, 이때 박기종은 뛰어난 일본어 실력 덕분에 통사(通事, 통역관) 4명에 포함되어 따라가게 된다. 1880년 김홍집 수신사 때도 통사로 따라갔던 그는 철도를 비롯해 여러 신문명 시설을 시찰하고 철도와 교육이 조선의 근대화를 가져올 것임을 믿어, 이후 철도부설사업과 교육사업에 헌신하게 된다.
 
박기종은 통사 외에도 부산판찰관, 부산경무관 겸 절영도첨사, 외부참서관, 중추원의관 등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1895년 부산경무관 시절 지역 유지들과 협의하여 부산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개성학교를 1896년에 설립하였다. 그는 또한 자신의 장남과 차남을 각각 일본의 광산학교와 철도학교에 유학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철도부설사업에 쏟아부은 박기종의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부산이 개항된 후 물산들이 더욱 몰려들고 교환이 번성하게 되자 그는 부산항과 하단포(낙동강 하구에 있는 물류의 중심지이자 벼의 교역장이었던 포구)를 연결하여 산물들을 운송할 철도부설을 계획하게 된다. 이를 위해 박기종은 1897년 ‘부산철도회사’를 조직해 농상공부에 허가를 신청하였으나 서류미비를 이유로 반려되었다. 이듬해 5월 다시 ‘부하철도회사(釜下鐵道會社)’라는 명칭으로 재신청해 허가를 받는데, 이것이 조선 최초의 민간철도회사이다. 그러나 ‘부하철도’는 기술과 자금의 부족, 일본의 경부선 부설 추진으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
 
그 이후 박기종은 1899년에 ‘대한철도회사’를 창립하는데, 프랑스 회사가 소유하고 있던 부설권의 기한이 만료되자 정부에 신청서를 제출, 승인을 얻어 경의선, 경원선, 함경선의 부설권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 역시 자금 부족과 부설권에 대한 일본의 개입으로 인해 부설권이 대한제국 직영 서북철도국으로 이관되고 말았다. 박기종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02년 또다시 ‘영남지선철도회사’를 설립하여 삼랑진과 마산을 잇는 경부선 지선철도인 ‘삼마철도’를 기획한다. 하지만 결국 영남지선철도회사의 자본과 실권도 일본이 장악하게 되었다.
 
박기종의 철도 부설의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가 근대화를 달성할 방법으로 철도를 만들려고 시도했던 모든 노력에는 경의를 표할만하다. 철도를 건설할 순 없었으나, 그가 1898년 상경해 외부참서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상경일기>와 <도총(都總)>이라는 책을 남겼으니 이는 중요한 외교관계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철원역은 일제강점기에 역장 (서기관급)을 포함하여 8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였으며,강원도내에서 제일 먼저 부설된 경원선은 일본인들이 러일전쟁이후 군사적 목적으로 부설하기 시작하여 일제강점 이후 주민의 강제동원과 10월 혁명이후 추방된 러시아 사람들을 고용하여 1914년에 완공하였다.사진/뉴시스
 
어느 보선원의 죽음
승객들이 열차 안에서 안전할 수 있도록 철로 위에서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름하여 ‘보선원’, 선로를 관리하고 수선하는 이들이다.
 
대전역 구내
몇백 갈래의 철로들
이 세상에 갈 곳이 많았다는 것을 슬프도록 알려준다
< … >
 
몇백 갈래의 철로 가운데서
떠나는 열차는
하나의 철로를 따라
목포로
부산으로
서울로 간다
 
그렇게 열차가 떠나고 들어오지만
쌩! 하며 내달리는 기차 세찬 바람에
기우뚱 넘어지지 않는 사람 있다
대전역 보선원 임씨
 
어제 동료 심씨가 열차에 치인 뒤
그 시체조차
너덜너덜 흩어졌다
가난한 장례는 슬픔보다 무서움이었다
 
장례 뒤 겨울 간 봄의 철로
땅이 녹으며
약해진 지반 찾아내야 한다
 
아직 추위가 남아
얇은 작업복 속 말라깽이 몸이 가엾다
 
철로 여기저기 땅! 땅! 쳐 귀기울이며
(‘대전역 보선원 임씨’, 14권)
 
열차가 다니는 사이사이 선로를 검사하고 두들기며 적은 인원으로 과중한 노동량에 시달려야 했던 보선원들. 깨진 침목을 바꾸고 바닥에 자갈을 까는 선로보수작업을 하다가 야간열차에 치인 동료를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들. 산재사망의 비극은 예전에도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난다. 일제 강점기, 인구에 회자되었다던 다음의 말은 당시 철도노동자들의 처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철로에 놓인 침목 하나하나가 한국 노동자들의 주검이다.”
 
철로를 깔다가 죽어간 당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보다 현재 보선원들의 노동조건이 얼마나 나아졌는지가 궁금해지는 이유는 철도의 공공성을 포기한 민영화와 그것을 위한 인력감축이 가져온 부작용 때문이다. 인력감축은 철도의 경영적자를 해결할 방법이 아닐진대, 그로 인한 철도노동자들과 승객(국민)의 안전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2016년 8월 현재, 철도노조 기술분야(차량, 시설, 전기) 조합원들이 인력충원합의 미이행을 비판하며 외주도급화 철회를 요구하는 것도 철도안전, 국민안전 때문이 아니겠는가.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도창리와 갈말읍 정연리 경계에 있는 금강산 전기철도교량은 1926년에 건립되었으며,남북분단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국 근·현대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구조물이다.사진/뉴시스
 
철로에 스민 시간들
철도가 생긴 이후 그 위를 달린 수많은 열차들 속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쌓였을 터, 그 중 가슴 아픈 많은 이야기들이 집약된 시기는 아마도 한국전쟁 당시일 것이다. <만인보>는 그 시절 피난열차의 한 풍경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서울역
마지막 떠난 피난길
화물차 열한 대
화물차 지붕 위에도 사람들 올라타고 떠났다
 
한강 건널 때 여섯 사람
화물차 지붕 위에서 추락했다 물귀신이 되었다
 
영등포역
1백명
화물차 안에 쑤시고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 철로에 누워
우리를 죽이고 가든지 태워주든지 하라 외쳤다
 
다음 차 온다
다음 차 타라
가회동 육청수가 외쳤다
 
너나 내려와
너나 다음 차 타라
나는 이 차 타야겠다
영등포 당산말 차용걸이 외쳤다
 
< … >
 
다음 차가 어디 있느냐
이 차가 마지막인 것 다 안다
영등포 도매상 주완봉이 외쳤다
 
마구 기어오르고
마구 밀어내며 차는 떠났다
 
탄 사람은 기뻤고
타지 못한 사람은
발 동동 구르고 팔 부들부들
타지 못한 영등포 공업학교 2년생
윤정호 군
어깨에 멘 쌀자루 내려놓고
빈 철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차 올 것이다라는 헛꿈
(‘그 중학생’, 19권)
 
아수라장이 된 열차의 풍경을 국내의 피난열차에서 찾을 수 있다면, 국외에서 보이는 지옥열차들 중 가슴 시리게 다가오는 것은 1930년대 극동지방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던 고려인들의 열차 풍경이다. 1937년 ‘일본의 첩자’라는 어불성설의 이유로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로 쫓겨 가게 된 고려인들은 시베리아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이동하는 지옥열차 속에서 근 한 달 가까이 기아와 질병에 시달려야 했고 죽음에 맞서야 했다. 17만이 훌쩍 넘는 한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차에서 떨어져 죽고 굶어 죽고 아파 죽었을 것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살아남은 자들은 황무지에 내던져져 맨손으로 땅을 일구고 새로운 고향을 가꾸며 수십 년간 공을 들였으나, 소련 붕괴 이후 독립국가가 된 그 나라들을 또다시 떠나야 하는 유랑민 신세가 되었다. 눈을 좀 더 돌리면, 유럽 각지로부터 아우슈비츠로 실려 온 유태인들의 열차 또한 지옥의 현장이었을 터, 세계 곳곳 철로에 스며 있는 절절한 이야기들을 다 알 수 없음에랴.
 
한편, <만인보>는 일상 속에 감추어진 또 하나의 이야기를 기차 풍경 속에 담고 있는데, 그 유명한 노래(<대전 부르스>) 속 ‘대전발 영시 오십분’ 기차가 배경이다. 마치 서글픈 인생의 만화경을 보는 듯하다.
 
통일호 순환열차가 더
한밤중 대전역에 무덤덤히 멈춰 있을 때
한 육중한 사내가 구내매점에서
국수 네 그릇 사들고
객차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 … >
한 그릇은 제 것일 테고
세 그릇은 동행하는 여자 셋의 것이었다
하나도 아닌
셋이나 한꺼번에 속여
 
남해 난바다 거문도에 팔아넘기러 간다
셋 가운데 둘은
벌써 하룻밤을 나눈 사이
 
둘보다 좀 미안하게 생긴 하나는
섬에 건너가면
다방
술상머리가 아니라
주방을 차지할 모양이었다
 
대전발 영시 오십분이 이렇게 악랄할 줄이야
(‘대전발 영시 오십분’, 10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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