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의 세상읽기)형설지공과 노오력
입력 : 2016-08-31 06:00:00 수정 : 2016-08-31 06:00:00
내가 1990년대에 독일에 처음 유학 가서 놀랐던 사실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아무리 둘러봐도 전봇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사방에 개똥이 널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라는 속담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그렇게 흔한 개똥마저 찾을 수 없단 말인가.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개똥을 흔히 볼 수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긴 되었나보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이 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기는커녕 개발도상국에도 끼지 못할 때도 우리나라에는 개똥이 흔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개똥’이 하찮은 것을 일컬을 때를 일컫는 접두어로 쓰일 정도였다. 예를 들어, 전혀 기름지지 않은 밭을 개똥밭이라고 한다. 또 주인 없는 길가 땅에서 자라는 참외를 개똥참외라고 한다. 정성껏 키우기는커녕 지나가다 한 번씩 찰 수도 있는 개똥참외에 맛이 들 리가 없다.
 
그렇다면 개똥벌레는 어떻게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까? ‘유리벽’과 ‘불씨’라는 노래를 불렀던 가수 신형원 씨의 최고 히트작 ‘개똥벌레’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아무리 우겨 봐도 어쩔 수 없네 / 저기 개똥 무덤이 내 집인 걸” 이 벌레는 밤에는 날아다니지만 낮에는 습기가 있는 곳에 숨어 있는데 어쩌다보니 소똥이나 갓 눈 개똥 밑에서 기어 나오는 모습이 농부들의 눈에 띄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수 있다. 하지만 아마도 예전에는 지천에 널린 벌레라서 개똥벌레라는 이름이 붙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요즘 개똥벌레를 개똥벌레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게 부를 정도로 흔하기는커녕 어디 가서 구경 한 번 해보기도 힘든 벌레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반딧불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반딧불이라는 이름은 왠지 낭만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반딧불은 사랑을 갈구하는 표식이기 때문이다. 반딧불이 꼬리에는 루시페린이라는 물질이 있다. 루시페린이 산소와 결합하여 산화할 때 빛이 난다. 빛을 내니 당연히 에너지는 소모되지만 열은 나지 않는 차가운 빛이다.
 
반딧불이 암컷은 배의 여섯 번째 마디에서 불을 내고 수컷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마디에서 불을 낸다. 당연히 수컷 불의 밝기가 두 배 정도 밝다. 암컷은 날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서 빛을 내면 날아다니던 수컷이 그 빛을 보고 찾아와 더 강한 불빛을 낸다. 수컷이 마음에 들면 암컷도 불의 밝기를 높여 구애를 받아들이고 짝짓기를 한다.
 
3년 전 보르네오 섬의 맹그로브 숲에서 나무 하나를 가득 메운 반딧불이를 본 적이 있다.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장관이었다. 그런데 사진으로 찍으면 그 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바로 옆에 있는 나무도 반딧불이로 가득하지만 바로 그 아래로 가지 않으면 그 빛은 보이지 않는다. 반딧불이는 짝을 찾기 위해서 꼬리를 밝히는 것이지 사람 좋으라고 불을 밝히는 게 아니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말이 있다. 진나라 차윤이라는 소년이 반딧불과 눈빛에 비추어 책을 읽는 노력 끝에 중앙정부의 고급관리로 출세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다. 글자가 매우 커서 한 페이지에 기껏해야 20글자쯤 되는 천자문을 읽으려면 반딧불이 80마리가 있어야 한다. 얘네들이 동시에 불을 밝히는 게 아니니까 아마 200마리쯤은 있어야 할 것이다. 형설지공은 ‘너의 성공은 네 환경이 아니라 너 자신에게 달려 있어. 형편 따위를 탓하지 말고 노력을 하란 말이야! 노오력!’을 그냥 네 글자로 줄인 말일 뿐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고. 이제는 시대의 개념으로 굳어진 ‘헬조선’이나 ‘흙수저’ 그리고 ‘노오력’을 빗대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젊은이들이 왜 이런 말을 쓰게 되었는지 살피시는 대신 다시 모두에게 도전, 진취, 긍정이라는 단어를 제시하셨다. 이 대목에서 오히려 젊은이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희극이자 비극이다.
 
예전에는 ‘개똥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못된 주인이 노비의 아이를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얼마나 하찮게 보이면 그랬을까? 주인마님에게 개똥이는 동창이 밝고 노고지리 우지지는데도 상기 아직 일어나지 않고 ‘노오력’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로 보였을 게다. 그러지 마시라. 그렇지 않아도 힘들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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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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