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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32화)손암과 다산의 형제지기(兄弟知己)
“날마다 미친 바다에는 / 배 한 척 뜨지 않는데”
2016-09-05 06:00:00 2016-09-05 06:00:00
올해 5월 해양수산부가 ‘17인의 해양역사인물’로 선정해 발표한 이들 중에는 충무공 이순신, 해상왕 장보고, 백제 근초고왕, 고구려 광개토대왕 등이 있는데, 이들보다는 우리에게 많이 생소하지만 눈길을 끄는 흥미로운 인물도 포함되어 있으니 바로 전남 신안 우이도(소흑산도)의 문순득이라는 어상(魚商)이다. 그는 1801년 12월에 출항해 흑산도 인근 태사도(태도)에서 홍어를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오키나와, 필리핀 등지를 표류하고 3년 2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의 표류기를 기록하여 <표해시말(漂海始末)>을 쓴 사람이 당시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손암 정약전이었다.
 
손암 정약전(1758~1816)과 다산 정약용(1762~1836)
올해는 손암 선생 서세(逝世)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정약용의 부친 정재원은 첫 부인 남씨와의 사이에서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 윤씨(고산 윤선도의 5대 손녀)와의 사이에서 약전, 약종, 약용 3형제를 낳았으며, 소실 김씨와의 사이에서 서자 약횡을 낳았으니, 정약전은 정약용과 동복으로 그의 둘째형이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노론 벽파가 천주교를 빌미로 남인과 시파를 제거하는데, 이때 천주교 신자인 셋째 약종은 처형당하고 둘째 약전은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로, 넷째 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몇 달 후 큰형인 약현의 맏사위 황사영이 조선의 천주교 박해 실상을 알리고 청나라의 무력 개입을 요청하는 밀서를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자(‘황사영 백서(帛書)사건’), 약전, 약용 형제는 다시 서울로 불려 올라가 조사를 받고 이번에는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형제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애를 나누고 사상을 공유했다. 서로의 학문에 대해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최고의 지기였던 두 형제의 관계는, 1816년 형 약전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아우 약용이 자신의 두 아들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슬프도다! 어지신 이께서 이처럼 곤궁하게 세상을 떠나시다니 원통한 그분의 죽음 앞에 나무나 돌멩이도 눈물 흘릴 일인데 무슨 말을 더 하랴! 외롭기 짝이 없는 이 세상에서 다만 손암 선생만이 나의 지기(知己)였는데 이제는 그분마저 잃고 말았구나. 지금부터는 학문을 연구하여 비록 얻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누구에게 상의를 해보겠느냐.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가 없다면 이미 죽은 목숨보다 못한 것이다.”(정약용 지음, 박석무 편역,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창비, 2016, 104쪽. 최초 간행은 시인사, 1979)
 
1801년 음력 11월 21일 나주 북쪽 5리 지점인 율정점(栗亭店) 삼거리(밤남정 주막거리)까지 동행해 내려온 두 형제는 거기에서 하룻밤을 잔 뒤 22일 아침 헤어져 각자의 유배지로 향하게 된다. 손암은 소흑산도로 불리던 우이도―수군부대가 주둔해 있어 우이보(牛耳堡)라고도 하였다―에 먼저 정착했다가 1807년 흑산도(대흑산도)로 거처를 옮겨 살았다. 1814년 다산의 해배 소식이 들려오자 손암은 아우가 자신을 보러 흑산도에 오기 위해 배를 두 번 탈 것을 염려한 나머지 육지에 가까운 우이도로 다시 떠나려 하였는데, 손암을 좋아하고 따르던 흑산도 주민들이 그를 보내지 않으려고 쫓아가서 붙잡아 왔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을 설득해 결국 우이도로 건너간 손암 선생은 이제나저제나 아우가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다산의 해배는 취소되고 2년여 후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우를 끝내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마니, 두 형제가 “율정(栗亭)에서 헤어진 것이 이렇게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앞의 책, 104쪽). 이때의 심정을 다산은 ‘율정별(栗亭別)’이라는 시에 담아두었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가서 처음 기거했던 사의재를 복원한 것이다. 사진/필자
 
<자산어보(玆山魚譜)>, 해양생물학의 시초
<자산어보>―학자에 따라 <현산어보>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는 정약전이 흑산도에 살던 시절 저술한 책이다. 동백나무와 후박나무로 뒤덮여 검게 보이는 산이 있는 곳, 쌀과 소금이 나지 않는 곳, 조선시대 목포에서 배로 보름은 가야했다던 오지의 섬에서 마음을 비우고 뱃사람들과 어울려 소탈한 삶을 살았던 정약전은 사리(沙里)의 ‘사촌서실(沙村書室)’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물고기를 비롯해 물새, 해조류에 이르기까지 여러 해양생물들을 관찰해 <자산어보>를 썼다. 이 책이 생물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과 식견을 가진 장창대라는 흑산도 주민과의 공동작업이었음을 손암 스스로 밝히고 있고(그 외 섬사람들의 경험적 지식 역시 도움이 되었을 터이다), 다산의 지시로 그의 제자인 이청(이학래)이 문헌고증을 하여 보충설명을 덧붙였으니 실제로는 여러 명의 합작인 셈이지만, 주된 공로는 여전히 정약전에게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험준한 시절 이 땅의 두 강이 한 강이 되는 강기슭에 태어나
형제가 혹은 장살당하고
혹은 유배당하였다
신유사옥으로
정약전 그도 아우 약용과 더불어 유배당하여
최원악지 흑산도로 귀양 갔다
그는 혹산이라는 이름이 무서워
뜻이 비슷한 글자로 갈아
자산(玆山)이라 하고 지냈다
그런 유배 16년 동안 파도에 에워싸여
날마다 미친 바다에는
배 한 척 뜨지 않는데
무엇을 쓰고 무엇을 노래하겠는가
그것도 헛것이매 그만두고
섬 안에 창대라는 글쟁이 하나 있어
그와 함께 지내며
흑산도 아니 자산도 바닷물고기에 정들었다
바다물새와 바다짐승 바다풀 바다벌레를 하나하나 익혀나갔다
이로써 흑산어보 아니 자산어보가 이루어졌다
거기에 한마디 덧붙이기를
후세 사람이 이를 고치고 바로잡으면
이 책은 치병에도 이용에도 이치에도
물음에 답하는 데도 쓰이리라
또한 시인들도 이로써 이제까지 미치지 못한 바
그것을 노래할 수 있으리라
 
노랑가오리
모양은 청가오리와 비슷하나
등이 노랗고 간에 기름이 많다
 
멸치
『사기』 「화식전」에는 추천석이라 하고
『정의』에는 잡소어
『설문』에는 추백어
『운편』에는 소어라 하였다
지금의 멸치가 이것이다
이에 앞서
선물용으로는 천한 고기이다
 
< … >
 
이렇듯이 노랑가오리 배도 갈라보고
아쉬운 대로 고서도 뒤져 밝혀내고
바다 밑 물속까지 살펴보며
16년 동안 절도 귀양살이 오늘이 오늘이 어제인데
눈감을 때가 와서
그저 눈 스르르 감으니
그의 죽음 슬퍼하는 자
오로지 파도소리
파도소리
파도소리
(‘정약전’, 4권)
 
약용은 형님 약전에게 보내는 다음의 편지에서 <자산어보>의 의의를 강조하고 그림보다 글로 설명하라는 조언을 해주고 있다. “<해족도설(海族圖說)>은 무척이나 기이한 책으로, 이 또한 하찮게 여길 것은 아닙니다. 도형(圖形)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글로 쓰는 것이 그림을 그려 색칠하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 … > <해족도설>은 이 항목으로 살펴볼 때 일부 연구가의 수요가 될 것이니 그 활용은 매우 절실합니다.”(<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앞의 책, 217쪽)
 
시에서 보이듯이, 정약전 스스로도 이 책이 치병(治病), 이용(利用), 이치(理致)에 쓰일 수 있음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여러 해양 동식물들의 이름, 형태, 습성, 분포 등을 밝힌 <자산어보>가 한국의 해양수산생물학의 시초를 열어준 과학서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리고 다산이 유배지에서 500여 권의 책을 집필한 것을 생각할 때, 손암, 다산과 같이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었던 실학자들이 정치적으로 희생되어 뜻을 펼치지 못했던 역사가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기와집으로 복원된 강진의 다산초당. 사진/필자
 
홍어장수 문순득(1777~1847)의 표류체험기 '표해시말(漂海始末)'
1801년 12월에 출항해 1802년 1월 흑산도 인근 태사도에서 홍어를 사가지고 돌아오던 우이도의 문순득 일행이 풍랑에 떠밀려 유구국(琉球國, 류큐, 현 오키나와), 여송국(呂宋國, 필리핀 루손 섬), 중국 오문(마카오), 광동, 북경과 의주를 거쳐 한양에 다다르고 고향 우이도에 1805년 1월에 도착할 때까지는 만 3년 이상이 걸렸다. 고향으로 돌아온 문순득은 자신의 표류과정, 유구와 여송 지역의 풍속, 가옥, 언어 등 다양한 내용을 구술하였고, 당시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정약전이 이를 기록하였다.
 
후에 다산의 제자 이강회(1789~?)가 1818년 우이도에 들어가 자신의 글과 스승인 정약용, 정약전의 글을 한데 묶어 <유암총서>와 <운곡잡저>를 펴내는데, 정약전의 ‘표해시말’은 <유암총서>에 실려 있다. 이강회는 또한 문순득의 구술을 다시 채록하여 그가 표류 여정에서 관찰한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 등지의 선박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운곡선설(雲谷船說)'을 썼다.
 
한반도 서남단
떠 있는 섬들
그 섬들 가운데 우이도
 
그 우이도 고기장수 문순득이
1801년 12월
흑산도 남쪽
난바다 외딴섬 태도에
홍어 사러 갔다가
홍어 사서 돌아오다가
태풍 만나 물머리에 들려 떠내려갔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게 떠내려갔다
 
제주 앞바다 거쳐
류우뀨우국(琉球國) 오끼나와 오오시마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1년 가까이 머물다가
돌아오는 길
 
이번에도 어디론가 떠내려갔다
물귀신을 면하여
필리핀 루손에 이르렀다
 
1803년 9월 루손 떠나
어찌어찌
마카오 거쳐 황해 거쳐 천진에 갔다
북경에서 육로로
의주
한양에 이르렀다
육로와
해로로
고향 우이도에 돌아왔다
1805년 1월이었다
 
돌아온 문순득 달라졌다
< … >
수많은 나라가 서로 오고 가는 것 보았다
 
그는 조선국이 삼면 바다의 문 닫아걸어
나갈 수 없고
들어올 수 없는 숨막힌 세상임을 한탄하였다
 
귀양살이 정약전에게
이 사연을 말하고
이 사연이 아우 정약용에게 전해졌으니
그 사연도 먼바다 하염없는 떠돌이였다
(‘문순득’, 26권)
 
손암을 통해 다산에게 전해진 문순득의 표류 이야기는 다산에게도 영향을 미쳐, 문순득이 광둥(廣東), 마카오 등지에서 보고 들은 화폐 관련경험담을 자신의 <경세유표> 집필에 참고하게 된다. 손암의 귀양살이 16년, 다산의 귀양살이 18년. 유배지에서도 백성의 삶을 살피고 백성들에게 이익이 될 일을 하고자 정진하던 이 형제는 오늘의 우리에게 큰 스승들임에 틀림없다. 현재 속의 과거, 과거 속의 현재를 투시하고 싶다면 다산연구소(이사장: 박석무)가 매년 조직하는 실학기행을 통해 정약전, 정약용 형제의 자취를 만나보라 권하고 싶다.
 
손암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흑산도의 사촌서실을 복원한 것으로 현판에는 사촌서당이라 쓰여 있다. 사진/필자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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