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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 세상읽기)타임슬립과 타임머신
2016-09-27 06:00:00 2016-09-27 06:00:00
타임슬립(time slip)은 과학소설(SF)과 판타지소설에서 주인공이 시간을 거슬러 여행하는 상투적인 장치다. 주인공은 타임슬립을 전혀 통제하지 못한다. 당연히 독자들에게도 타임슬립의 원리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SF에서 많이 쓰이는 이유는 같은 사람이 다른 시공간에서 겪는 부조리를 극명하게 드러내기에 좋은 장치이기 때문이다.
 
옥타비아 버틀러(1947~2006)는 타임슬립의 전형을 보여주는 미국 흑인 여성 작가다. 그녀는 백인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SF계에서 문학적인 성취와 상업적인 성공을 함께 거두었다. 그녀는 인종과 젠더의 문제를 완벽하게 녹여낸 페미니스트이면서 동시에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의 대표주자로 유명하다. 아프로퓨처리즘은 아프리카의 정신과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의 기술을 역사, 판타지, 과학을 매개로 융합한 예술 사조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SF 『킨』은 인종과 성이라는 이중 차별을 고발하는 타임슬립 이야기다. 1976년 6월 남자친구와 함께 집을 합친 날 짐을 풀던 주인공은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깨어 보니 다섯 살쯤 된 백인 아이 루퍼스가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다. 아이를 구해낸 주인공에게 아이 엄마로 보이는 백인 여성이 총을 들이댄다. 공포에 빠져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 보니 남자친구가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다. 자신이 몇 분 동안 기절해 있었다고 한다. 몇 시간 후 다시 정신을 잃는다.
 
이번에도 위험에 빠진 같은 아이를 구한다. 그런데 나이가 조금 더 들었다. 루퍼스는 주인공을 검둥이라고 부른다.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다. 그렇다. 그녀가 있는 곳은 1976년의 서부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1815년의 동부 메릴랜드다. 그리고 알고 봤더니 그 꼬마와 여자 노예 사이에서 자신의 먼 조상이 출생한다.
 
타임슬립은 반복해서 일어난다. 현재에서는 자유인인 주인공이 과거로 가면 노예로 산다. 부엌이나 밭에서 허리가 부러져라 일을 하고 도망을 치려다가 잡혀 채찍에 맞는다. 타임슬립이 거듭될수록 루퍼스는 성장하여 농장주가 되고 씨받이 흑인 노예에게서 애가 태어난다. 주인공은 매번 루퍼스를 위험에서 구해준다. 아직 자신의 조상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치밀하게 진행되고 결말은 짜릿하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노예들, 특히 여성 노예들이 겪어야 했던 참혹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마치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같고, 마치 내 등에 채찍을 맞는 것 같다. 우리가 문학에서 감동을 받는 이유는 그것이 내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19세기 미국만의 이야기일까.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았다. 단지 노예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고 사고 파는 전문상인이 없었을 뿐이지 종이 바로 노예였다.
 
『킨』의 주인공은 자신이 20세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까? 현재 미국 흑인의 삶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요즘 매일 타임슬립을 경험한다. 잠깐 한눈 팔고 있다 보면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20세기와 21세기를 매일 오고간다.
 
농민 백남기(1947~2016)는 내가 다섯 살이던 1968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박정희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두 차례 제적되었고 수도사 생활을 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80년에 대학에 복학했지만 전두환 휘하의 계엄군에게 체포되었다. 석방 후 농민이 되어 우리밀되살리기운동을 했다. 그리고 내가 쉰세 살이던 2015년 11월 4일 민중총궐기 도중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 317일간의 의식불명 상태를 겪은 후 지난 9월 25일 오후 소천하였다.
 
경찰은 사인규명을 위한 부검을 하겠다고 시신압수영장을 신청했다. 영장 신청 이야기가 전해지자 머릿속에서 나는 경찰이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간부 시신 강제 탈취 사건이 일어난 2014년으로 타임슬립되었다. 법원이 영장 신청을 기각하자 또 내겠다고 한다. 이번에는 장례식장 벽을 뚫고 들어와 한진중공업 노동자 박창수 시신을 탈취한 1991년으로 타임슬립되었다. 그런데 도대체 경찰은 뭐가 궁금한 것일까? 농민 백남기의 사망 원인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두 차례 받은 고문의 결과인지, 아니면 박근혜 대통령 시절의 물대포 때문인지가 불분명한 걸까? 아서라. 말아라.
 
타임머신은 타임슬립과는 다르다. 타임슬립은 주인공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지만 타임머신은 의도적으로 시간을 거스르는 장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임슬립이 아니라 타임머신이다.
 
박민호 기자 dducksoi@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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