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현재를 살다간 샤넬의 전설
입력 : 2019-03-05 06:00:00 수정 : 2019-03-05 06:00:00
“현재를 사세요. 그리고 미래를 창조하세요.” 패션계의 카이저(Kaiser·황제)로 불렸던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가 남긴 말이다. 심금을 울리는 대단한 명언도 아니고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굳이 인용하는 이유가 있다. 결코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를 살지 못한다. ‘내일을 위해 일해야지, 내일을 위해 저축해야지’라며 미래에 발목 잡혀 살다가 마침표를 찍는다. 특히 재물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인간은 공수래공수거인데 저승까지 싸갈 수 있는 것 인양 평생 돈만 모으다 죽는 사람도 있다.
 
샤넬(Chanel)의 대명사였던 라거펠트는 자신의 말을 고스란히 실천한 사람이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패션계를 주름잡은 거장의 저승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했다. 그는 무덤도, 장례식도 원치 않았다. 유언대로 파리 북부 낭테르(Nanterre)에 있는 몽 발레리앙(Mont-Valerien) 화장터에서 그의 시신은 한줌의 재가 되었다. 현재를 최대로 산 자의 마지막 길에 더 이상 필요할 게 없다는 뜻이었을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라거펠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파리 8구 캉봉(Cambon) 거리 샤넬 본사 앞에는 그의 명복을 비는 팬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진열장 앞에는 꽃다발과 쪽지 글들이 수북하고, 심지어 부채를 헌정한 사람도 있었다. 런던의 패션 위크(Fashion week)는 라거펠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1분 간 묵념을 올렸다. 영국 찰스 황태자의 부인 카밀라 파커 볼스(Camilla Parker Bowles)가 참석한 베서니 윌리엄스(Bethany Williams) 패션쇼에서도 조명을 줄이고 1분 간 묵념했다. 파리에서는 주간지 마담 피가로(Madame Figaro)가 “라디오 방송국에서 열린 클로에(Chloe) 패션쇼의 긴 의자 위에 우편엽서들이 놓였다. 라거펠트가 1964년부터 1983년까지, 그리고 1992년부터 1997년까지 클로에 기성복을 디자인 할 때의 모습과 그의 패션이 담긴 몇 장의 사진이 놓인 우아한 의례였다”고 전했다.
 
라거펠트하면 프랑스 샤넬이 자동으로 연상되지만 그는 사실상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열여섯 살 때 크리스찬 디오르의 패션쇼를 보고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하고 모든 것을 걸 각오를 했다. 파리에 둥지를 튼 라거펠트는 1954년 11월25일 울마크(Woolmark)가 주관한 ‘모직물 국제 사무국’ 콩쿠르에서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과 함께 공동 1위를 차지했다. 이 둘은 평생 라이벌 관계로 지내면서 세계 패션계를 30년 간 역동적으로 이끌었다. 둘 사이의 차이도 있었다. 이브 생 로랑은 자신의 이름을 새긴 옷을 만들었지만 칼 라거펠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새겨 옷을 만들지 않은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나는 용병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라거펠트는 유명 브랜드 클로에의 소품을 만들고 고급 의류를 프레타포르테(기성복)로 만들었다. 실비아 벤추리니 펜디(Silvia Venturini Fendi)와 함께 이태리 명품브랜드 펜디의 수뇌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롭길 고집했고 전속계약은 뿌리쳤다.
 
라거펠트가 큰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83년 샤넬에서 일하면서부터다. 이때 라거펠트는 샤넬의 오트꾸튀르 컬렉션, 프레타포르테, 소품 아트 디렉터였다. 당시 샤넬은 파산 위기에 놓여있었다. 라거펠트는 코코 샤넬과 피에르 워데머(Pierre Werthheimer)가 창립한 샤넬의 이미지를 다시 드높이기 위해 마케팅까지 혁신했다. 그는 유니레버와 같은 다국적 기업의 협찬을 얻어 유명 여가수·여배우들의 영상필름에 샤넬 스타일을 넣었다. 그리고 수많은 샤넬 광고캠페인을 벌였다. 그의 전략은 적중해 샤넬은 부활했다. 샤넬의 책임자였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라거펠트는 클로에의 아트 디렉터, H&M과 같은 패션업체와도 일했다.
 
명품인 샤넬, 클로에, 펜디의 디렉터였던 라거펠트의 소식을 이렇게 장황하게 전하는 이유가 있다. ‘올백’머리, 검은색 선글라스, 목까지 올린 빳빳한 와이셔츠 깃, 요란한 반지들로 대표되는 그의 스타일 때문이었을까. 필자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길은 그간의 생각들을 송두리째 흔들어 놨다.
 
많은 한국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은 호화롭다. 가장 좋은 삼베옷을 입고 리무진을 타고 조문객들에게 식사까지 대접한다. 그러나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현재를 즐기고 현재를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죽어서의 호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승에서 제대로 살지도 못한 채 꽃가마 타고 저승 간들 뭐가 그리 행복할까.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잠시 여행 온 나그네다. 여행객은 자기가 머무는 곳에서 가장 많이 보고 가장 많이 느끼면서 최대로 즐기는 것이 임무다.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면 제대로 된 여행을 할 수 없다. 적당한 짐을 지고, 현재를 살고, 죽어서는 빈손으로 가볍게 떠나자. 돈과 명예와 화려함의 대명사였지만 정작 마지막 길은 검소하기 짝이 없었던 라거펠트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최인숙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sookjuliette@yahoo.fr)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프랑스 정치현상을 잣대로 한국의 정치현실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 ‘빠리정치 서울정치(매경출판)’를 펴냈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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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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