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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11화)극동과의 작별
2019-12-02 00:00:00 2019-12-02 00:00:00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시카치알랸이 남긴 단상
 
콤플렉스에서 어린이들의 특별활동 수업을 지도하던 따찌야나(따냐) 까찰로바 씨는 한티족이고 그녀의 남편 일리야 씨는 에벤키족이다. 나나이족 마을 시카치알랸에는 슬라브족 러시아인들도 있고 몇 명 안 되지만 따냐 씨처럼 다른 소수민족들도 있다. 따냐 씨는 서시베리아의 튜멘주 출신이고 일리야 씨는 극동의 오호츠크 근교 출신인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학에서 만나 결혼하고 남편의 지역으로 귀향했다가 시카치알랸에 정착하게 된 경우이다.
 
따냐 씨는 이 마을에 김씨 성의 고려인 가족도 산다고 귀띔해 준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살고 아들은 자기 가정을 이루어 따로 사는 두 가구인데, 우즈베키스탄에서 이주해 왔다고 한다. 소련이 붕괴한 후 민족주의가 심해진 우즈베키스탄을 떠나 연해주로 이주하는 고려인들도 적지 않았는데, 이 두 김씨 일가 혹시 그러했던 게 아닐까? 블라디보스토크나 하바롭스크처럼 큰 도시도 아니고 이 작은 시카치알랸 마을로 오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로데코프 하바롭스크 지역박물관(향토박물관)에 전시된 사진으로, 사냥총을 들고 배를 탄 나나이족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의 옷과 유사한 남자 의복이 시카치알랸 박물관에도 전시되어 있다. 사진/필자 제공
 
모두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하바롭스크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데 함께 놀던 마을어린이들이 따라온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 누군가가 반갑게 말을 걸어온다. ‘북부토착소수민족 하바롭스크지역 청년사회단체’인 ‘피닉스 아무라’(아무르의 불사조)의 대표인 타마라 악탄코 씨이다. 하바롭스크에서 돌아오는 길인지 마을에 머무는 동안 보지 못했던 그녀를 두 아들이 마중 나와 반긴다. 그녀는 나를 뒤늦게 만나게 된 아쉬움을 전하더니 급히 집으로 달려가 책 한 권을 가져와서 선물한다. <고대 아무르의 비밀들>이라는 제목 밑에 ‘하바롭스크지역 민족작가 작품모음집’이라는 부제가 쓰여 있는데, 울치족 출신의 한 작가와 나나이족 출신 작가들의 이름이 보인다.
 
러시아 연방에는 북부와 시베리아, 극동의 토착소수민족(종족)들을 연결하는 협회가 있다. 협회 산하 청년단체 일을 하는 타마라 씨의 진지한 열정이 대화 속에 묻어난다. 소수민족들의 연합 조직은 그들의 생존을 위해 필수일 것이다. ‘소수’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영역에서건 어려운 일이다. ‘다수결의 원칙’을 민주주의로 잘못 배워온 우리가, 다수의 횡포 속에 소수가 무시되고 배제되는 상황에 대해 의심을 할 때, 소수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토론을 할 때, 오히려 민주주의를 향해 나가게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러시아와 중국의 소수민족들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소수민족들에 대해, 그들이 겪는 가난과 잃어버린 평화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콤플렉스 강당에 걸려 있는 소련 시절 시카치알랸 마을사람들(나나이족)의 모습. 왼쪽의 여성들은 '감사합니다'라는 깃발을 들고 있고 오른쪽의 남성들은 낚시와 사냥을 하는 차림새이다. 사진/필자 제공
 
샤머니즘 이야기
 
시카치알랸에서 만난 샤머니즘 문화의 흔적은 시베리아 샤먼과 한국 무당의 닮은 듯 다른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러시아에서 논문작업을 하던 시기, 엘리아데의 <샤머니즘>에서 시베리아 샤먼은 천상이나 지하세계로 가서 영(靈)을 만난다는 대목을 읽고 한국 무당과의 차이점에 대해 흥미로워했던 적이 있다. 우리 무당은 저승의 영을 이승으로 불러와 대화하지 않는가!
 
시카치알랸 마을 박물관에 걸려 있는 샤먼 그림. 사진/필자 제공
 
수년 후 알타이 지방에서 실제로 시베리아 샤먼을 만났을 때 나는 그 대목을 다시 떠올렸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나이 지긋한 샤먼은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운 뒤 한참 동안 눈을 감은 채 미동 없이 앉아 있다가 우리에게 돌아왔는데, 그 시간 동안 그녀는 ‘저 세계’로 가 영(靈)을 만나고 온 것이다. 몽골 내 소수민족 유목민인 차탕족의 샤먼을 만났을 때 그녀가 보여준 모습도 한국의 무당보다는 시베리아 샤먼을 상기시켰다. 의식(儀式) 때 입은 옷이나 사용한 북이 시카치알랸 마을 박물관에서 본 것과 비슷하다.
 
비록 많은 샤먼들을 보지 못했고 극히 제한된 개인적 경험에 불과하지만, 나에게는 한국의 무속문화가―그 원류를 시베리아에 두고 있다할지라도―더욱 풍부한 서사성과 연극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서사무가(敍事巫歌)에는 우주관과 내세관, 인간의 일생이 담겨져 있다. 또한, 춤, 노래, 행위, 극적인 요소들이 어우러져 여러 개의 ‘거리’들을 구성되고 거리들 전체의 짜임새와 완결구조는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듯한 인상을 준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생활한 다니엘 키스터 신부가 서강대 교수 시절 <무속극과 부조리극: 원형극에 관한 비교 연구>(1986년)라는 흥미로운 책을 쓴 것도 우연이 아니리라.
 
도서관 이야기
 
하바롭스크로 돌아와 다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 전, 어김없이 ‘영원의 불꽃’을 찾았다. 시카치알랸에도 작고 매우 소박하지만 대조국전쟁(1941~1945) 시기에 산화한 장병들을 기리는 파란 기념탑이 있다. 하바롭스크의 ‘영원의 불꽃’을 둘러싼 수 겹의 비석들, 그 대조국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전사자 명단 중에서 나는 또다시 김씨와 박씨를 찾아냈다. 날이 어둑해지도록 명단에서 고려인 이름을 찾고 있는 이 심리는 무엇인가. 이곳의 맞은편에는 아프가니스탄(1978~1989), 북캅카스, 시리아 등 러시아(또는 소련)가 관여했던 여러 전쟁 중에 죽어간 병사들의 명단도 있다.
 
하바롭스크 '영원의 불꽃'. 뒤편에 대조국전쟁 전몰자 명단이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하바롭스크 거리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옛 건물들과 옛 인물들의 이야기, 유적지들은 극동에 진출한 러시아의 역사이다. 당신이 그로데코프 향토박물관을 방문한다면 분명 하바롭스크 지역의 자연과 역사, 소수종족과 민속학에 대한 많은 이해를 얻을 것이다. 그곳은 나나이족 사냥꾼 데르수의 친구, 극동지역 탐사대장이었던 아르세니예프가 일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는 역시 아르세니예프가 관장으로 근무했던 극동국립과학도서관에서였다. 안내데스크 옆 사무실 안에 뭔가가 전시되어 있어 양해를 구하고 들어가 보니 사무실 벽에 도서관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진열되어 있다.
 
하바롭스크에 있는 극동국립과학도서관. 사진/필자 제공
 
1894년 12월 도서관이 설립되었을 때 그 건물은 셰브첸코 거리에 있었고 니콜라이 2세의 이름을 따 ‘니콜라예프 공공도서관’으로 명명되었다. 현재 위치인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거리 1번지의 건물로 옮겨진 것은 대조국전쟁 때의 일이다. 동시베리아 총독이었던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백작의 이름을 딴 이 거리의 현 도서관 건물은 1902년에 지어진 것으로, 처음에는 상인 플류스닌의 거래소였고 이후 와인·식료품점, 우수리 철도관리소 등을 거쳤다. 그런데 전쟁이 나자 주정부가 기금을 마련해 하바롭스크 최대의 부유한 거주지인 이 건물을 도서관으로 개조하고 셰프첸코 거리에 있던 도서관의 내용물을 통째로 옮겨온 것이다.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거리의 모퉁이로, 건물에 약국 간판이 보인다. 대조국전쟁 당시 극동국립과학도서관은 여기로 이전되었다. 사진/필자 제공
 
“남자들은 전선에 나가고 없었어요. 여자직원들만 남아 있었는데, 그들이 도서관의 모든 책을 직접 손으로 날랐지요. 엄청난 작업이었습니다.” 사무실에 있던 사서의 말이다. 26명의 여성이 약 70만권의 책을 일일이 날랐다는 것. 놀랍고 감동적이 아닐 수 없다. 문득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떠올린다. 마케도니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후원으로 성장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학문과 지식의 중심을 아테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이동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도서관은 불타고 세계의 유산인 장서들은 소실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된 원인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기원전 48년 알렉산드리아 전쟁 중 카이사르의 방화가 실수로 확산됐다는 설부터, 3세기경 아우렐리아누스의 침략, 391년 콥트 교황 데오필루스(Theophilus)의 칙령에 의한 기독교도들의 파괴, 642년 이후 무슬림의 알렉산드리아 점령에 이르기까지 여러 설만큼이나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타고 파괴된 이유가 무엇이건, 인류에게 있어 도서관이 갖는 함의를 그토록 잘 보여준 사례는 드물 것이다. 수많은 하바롭스크의 역사 이야기들 중에서 전쟁 중에 옮겨진 도서관 일화에 특히 감동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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