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25화)긍정과 부정 사이, 삐오네르와 꼼소몰
입력 : 2020-03-16 08:00:00 수정 : 2020-03-16 08:00:00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같은 시절, 다른 평가
 
소련 시절의 소년단인 삐오네르(개척자, 선봉대)와 공산주의 청년동맹 꼼소몰에 대한 기억과 평가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만나 지금도 친분을 이어가는 류다 씨(12화 참고)는 삐오네르와 꼼소몰에 대한 의견을 묻는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시대에는 다른 이데올로기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악쨔브료녹(10월 어린이)이 됐고 열 살에는 삐오네르, 열네 살엔 꼼소몰에 가입했지요. 그들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었고 자격이 없는 것으로 간주됐습니다. 사람들은 밝은 미래를 믿었어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다른 삶을 알지 못했습니다.”
 
1981년 5월 마지막 수업을 마친 류다 씨의 10학년 급우들. 류다 씨는 다른 행사에 참여 중이라 사진에 없다. 그녀의 고향인 서시베리아 남부 쿠르간 주의 크라스나야 즈베즈다(붉은 별) 마을 학교 뒷편 숲에 자작나무들이 보인다. 사진/류드밀라 슈빠크
 
류다 씨는 10학년이던 1981년 지역신문 <전위>에 졸업시험 우수자로 실린 적이 있는데, 기사는 그녀가 꼼소몰 열성분자이자 학급의 학습부원으로 공공 과제들도 잘 수행했다고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질문에 답하는 그녀의 말 속에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던 환경에 충실했을 뿐인 옛 모범생의 소회가 느껴진다. 같은 질문을 받은 여러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다. “삐오네르와 꼼소몰 조직에 가입해 있었지만 활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와 관련해 좋은 기억이 없다. 진지하게 말해서, 이 조직들은 80년대에 자신의 최상의 측면을 보여주지 못했다. 형식적이고 허위였다.”(친구 레나) “80년대 중반에 삐오네르가 됐는데 조직은 이미 형식적이었다.”(알혼 섬 숙소에서 만난 따냐 씨) “삐오네르 조직은 소련이 끝날 때까지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친구 미샤)
 
1981년 지역신문인 '전위'에 졸업시험 우수자로 10학년 류다 씨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사진/류드밀라 슈빠크
 
친구 미샤는 삐오네르 조직의 긍정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사교적이지 않고 공부가 주요 임무라 생각해 삐오네르의 공공 활동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꼼소몰에 대해선 부정적이다. “거의 모두가 꼼소몰 대원이었다. 꼼소몰이 아니면 몇몇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고 이데올로기 학부는 물론 그랬다.” 꼼소몰의 형식성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내키진 않았지만 대학 입학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뒤늦게 가입했다고 말한다. 한편에는 긍정적인 역할이, 다른 한편에는 강제성과 형식성이 있었던 셈이다.
 
스베따의 남은 이야기
 
반면, 나의 다른 친구 스베따는 ‘아를료녹’ 덕분에 행복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아를료녹은 흑해 연안 낮은 산들 사이에 위치한 ‘전(全)러시아삐오네르캠프’를 가리킨다. 지난번에 말한 대로 스베따의 분견대는 ‘분견대 더하기 지도원’이라는 경기에서 우승했고 그 보상으로 대원들 중 6명이 바로 이 아를료녹 캠프에 30일간 참가하게 된 것이다. ‘새끼독수리’라는 뜻의 아를료녹은 러시아 내전 당시의 전설적인 영웅 소년을 기념해 붙여진 이름이다. 마르크 다니엘의 이디시어 희곡 <쟘카 코빠치>(러시아어 제목은 <소년>, 1936)의 주인공이 바로 붉은 군대의 소년병 영웅인데, 이 연극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 <아를료녹>은 소비에트 시절에 민요처럼 불렸다고 한다.
 
스베따의 남은 회상기를 살펴보자. “아를료녹은 나의 삐오네르 생활에서 최고였습니다. 아를료녹에는 여러 개의 삐오네르 분대과 꼼소몰 하나가 입소했고 각 분대는 자신의 건물과 이름, 테마가 있었습니다. 나는 ‘신속’분대의 제2분견대에 포함되었습니다. 분대 건물은 배 모양이었고 우리 분견대는 건물의 최상층인 ‘갑판’에서 지냈습니다. 분대 내 제2분견대의 과제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송출이었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선실을 갖고 있었습니다.”
 
류다 씨의 남편 세르게이 슈빠크(제일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 1972년 1학년 악쨔브료녹(10월 어린이)들이다. 카자흐스탄의 잠불(현 타라즈 시)에 있는 학교로, 선생님 바로 옆의 오른쪽 어린이 스베따는 성이 유가이(유씨)인 고려인이다. 사진/ 세르게이 슈빠크
 
아를료녹 캠프에는 많은 동아리가 있어 참가자들이 그곳에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스베따는 우주의학 동아리에, 그녀의 친구는 어린 비행사 동아리에, 그리고 같은 분견대의 한 소년은 어린 천문학자 동아리에 참여했다. 시합, 콘서트, 하이킹, 춤과 노래, 아래 학년 대원 돌보기 등 보통의 청소년 캠프에서 볼 수 있는 활동들 외에, 소련의 이 30일 캠프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삐오네르-꼼소몰-공산당원으로 가는 일종의 ‘지도자’ 양성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분견대의 평대원이자 지도자, 조직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분견대 회합에서 열흘마다 조장들과 분견대 평의회 의장을 새로 선출했습니다.”
 
스베따가 기억하는 두 가지 회합은 ‘자신에 대해 내게 말해줘’와 ‘나에 대해 내게 말해줘’이다. 저녁때 촛불을 켜고 꼼소몰 지도원의 안내로 진행된 이 두 회합은 각각 캠프의 시작과 끝에 배치되었다. “지도원 나따샤는 자신의 셔츠에서 아를료녹(독수리) 배지를 떼 내어 손에 들고 잠깐 자신에 대해 말했습니다. 나타샤는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이 배지를 건네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배지를 서로에게 넘겨주면서 새로운 동료들에게 자신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독수리 배지는 동료들에 의해 그 칭호에 합당하다고 인정받은 사람만 착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30일 후 분견대의 마지막 모임에서 결정됩니다. 우리가 손에 배지를 들고 있을 때, 우리는 이 동지적인 형제애에 관여하고 있고 그 앞에 책임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아를료녹 캠프의 마지막 회합에서 동료들에게 인정받은 대원에게 수여되는 아를료녹(새끼독수리) 배지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마지막 회합에서 팀원들과 지도원들은 각 대원에 대해 좋은 점을 말하고 비판을 하지만 동지들이기 때문에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게 그녀의 말이다. ‘독수리’의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 대원들을 분견대가 결정하면 지도원은 그들의 셔츠 위에 독수리 배지를 달아주었다. 하지만 캠프에서 돌아온 후 스베따는 오히려 꼼소몰 활동에서 멀어지게 된다. “집으로 돌아오자, ‘아를료녹’과는 대조적으로, 우리 학교의 삐오네르와 꼼소몰 생활의 형식적인 성격을 격심하게 느꼈습니다. 나는 그것에 대항할 힘과 열망이 없었습니다. 나는 학교의 삐오네르, 꼼소몰 조직 활동에서 점점 멀어졌습니다. 나는 이것이 아를료녹 캠프에 다녀온 다른 여섯 명에게도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러시아의 애국주의와 청소년 군사화
 
‘전러시아삐오네르캠프’였던 아를료녹은 현재 ‘전러시아어린이센터’가 되었고, 크림반도 해안에 위치한 ‘전연방삐오네르캠프’ 아르떽은 이제 ‘국제어린이센터’로 불린다. 아르떽 캠프는 소련과 외국의 청소년들이 포상으로 갔던 곳이다. 지금은 누구나 돈을 내면 갈 수 있는 곳들이지만, 소비에트 시절 포상으로 아를료녹이나 아르떽 캠프에 참여했던 청소년들은 분명 좋은 내용의 교육을 경험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일상적인 학교에서의 삐오네르 조직과 특히 꼼소몰은 점점 형식적으로 변질되어 갔는데, 이는 인민을 배제하고 관료화된 공산당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 다른 삐오네르의 추억을 가진 스베따와 미샤 바쥴린은 중년이 지나 뒤늦게 부부가 되었다. 상이한 경험치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둘 다 사회주의 이상을 지향했고 그렇지 못했던 꼼소몰의 ‘형식성’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꼼소몰은 점점 더, 내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형식 그 자체를 위해 일을 해 갔습니다. 공산주의 방향에서 젊은이의 발전을 목표로 하는 구체적인 활동들을 한 것이 아니라 상급 간부에게 보고하기 위해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러시아 연방 국방부 사이트(mil.ru)에서 유나르미야(youtharmy)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러시아 연방 국방부 사이트
 
현재의 러시아는 어떤 상황일까? 2016년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 장관의 발의로 ‘청소년 군대’를 뜻하는 ‘유나르미야’라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유나르미야의 공식 사이트에는 이 조직이 “청소년 단체들의 좋은 전통을 되살린 자발적인 러시아 어린이·청소년 운동” 또는 “전러시아 어린이·청소년 군사·애국 사회운동”으로 소개되어 있다. 또한, 유나르미야 운동이 러시아 전역에 걸쳐 60만 명 이상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통합시켰고 러시아의 85개 지역에 지역 본부가 있다고 쓰여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청소년 단체들의 좋은 전통’에는 아마도 러시아의 스카우트, 삐오네르와 꼼소몰이 다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러시아는 현재 징병제(1년 복무)와 모병제를 병행하고 있다. 징집 규모는 꾸준히 감축되어 왔고 모병제로의 점진적인 전환이 추진되는 중이다. 그러나 유나르미야를 비롯해 많은 생도 조직, 군사 교육 기관들이 존재한다. 청소년들의 군사화는 분명 경계할 일인데, 우리에게 화랑이 있었던 걸 생각하면, 지덕체의 심신 수련에 덧붙여 애국주의를 고취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방식은 동서고금에 공통된 게 아닐까 싶다.
 
유나르미야 공식 사이트(yunarmy.ru)에 실린 대원들 모습. 사진/유나르미야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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