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생명이 하나의 세계를 살다 갑니다. 뱀은 온도의 세계를, 박쥐는 초음파의 세상을 삽니다. 반면 인간은 그저 주어진 하나의 세계를 사는 데 만족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펜을, 때로는 마우스를 들고 빅뱅에 버금가는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며 새 세상을 창조해냅니다. 그렇게 연극 무대가 세워지고 영화가 개봉됩니다. 거울과도 같은 세상으로 초대된 관객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웃고 웁니다. 응시하는 관객,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관객을 아예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영화도 있습니다. 바로 게임입니다. 주체가 된 관객을 우리는 게이머라 부릅니다. 주말 아침 플레이스테이션을 켜는 아버지, 숙제 끝내고 컴퓨터 앞에 앉은 딸은 어느 세상 속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는 걸까요. 새롭게 준비한 코너 '이범종의 게임 읽기'는 게임 속 세상을 든든히 받치고 있는 이 이야기들의 만듦새와 구조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첫 순서로 실시간 액션 롤 플레잉 게임의 기준을 세운 '디아블로'의 세계를 소개합니다. 게임의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서 디아블로를 배경으로 만든 소설들을 참고해 기술합니다. (편집자주)
성역의 아버지 이나리우스가 지옥에 쳐들어가 자신의 권능을 과시하고 있다. (사진=디아블로IV 예고편 갈무리)
[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빛이라곤 타오르는 용암뿐인 땅. 중무장한 군대가 열 맞춰 방패를 세웁니다. 그 위로 빛을 뿜는 천사 한 명이 눈부신 날개로 권능을 과시합니다. 악마 떼를 응시하던 천사는 머리에 뿔이 난 여자를 발견하고 날아가 창을 던지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찾아, 내가 지옥으로 돌아왔노라."
인간의 부모이자 한때 서로 사랑했던 천사와 악마 부부가 오늘(2일) '디아블로IV'에서 다시 만납니다.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디아블로 시리즈는, 처음부터 인간에게 친절할 수 없었던 세상의 탄생과 가혹한 숙명, 그럼에도 스스로 운명의 주인을 자처한 사람들의 대서사시입니다. 어째서 천사와 악마가 인간의 부모인지, 천사가 왜 지옥에 "돌아왔다"고 하는지 알려면 처음으로 돌아가 이 세계의 기구한 역사를 읽어야만 합니다.
영원한 분쟁에 환멸을 느낀 천사 이나리우스(사진 왼쪽)과 증오의 군주 메피스토의 딸 릴리트는 세계석을 들고 사랑의 도피를 한다. (사진=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반역자 부모의 혼혈 자식, 인간
마법학자 데커드 케인의 논문 '케인의 기록'에 따르면, 태초에 진주알 결정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안의 영혼 '아누'는 선과 악, 빛과 그림자, 물질과 상징, 기쁨과 슬픔을 품었습니다. 태초의 절대신은 고찰 끝에 정제된 순수함이 되려고 모든 악의 요소를 몸에서 뽑아냅니다. 그 악의 조각들은 일곱 머리를 가진 용 '타타멧'이 되어, 아누와 우세 없는 빛과 그림자의 싸움을 이어갑니다.
영겁의 세월을 싸우던 둘은 마지막 일격으로 서로를 폭발시켰고, 이들의 정수가 흩어지며 우주가 탄생합니다. 아누의 척추는 드높은 천상의 기틀인 수정 회랑이 되고, 부패한 타타멧의 살은 불타는 지옥이 됐습니다. 천상의 수정 회랑에서 아누의 공명이 천사를 낳았고, 잘린 용의 일곱 머리에서 가장 힘 센 대악마 셋과 고위 악마 넷이 태어납니다. 이 가운데 대악마는 파괴의 군주 바알, 증오의 군주 메피스토, 그리고 공포의 군주 디아블로입니다. 공포가 증오로 화하고 증오는 파괴로 이어지며 서로의 힘을 키웁니다. 고위 악마는 고통의 군주 두리엘, 고뇌의 여제 안다리엘, 거짓의 군주 벨리알, 죄악의 군주 아즈모단입니다.
드높은 천상은 앙기리스 의회의 대천사 다섯이 이끕니다. 용기의 대천사 임페리우스, 정의의 대천사 티리엘, 희망의 대천사 아우리엘, 운명의 대천사 이테리엘, 지혜의 대천사 말티엘입니다.
천상과 지옥은 천지창조의 심장인 '세계석'을 차지하려 혼돈계에서 '영원한 분쟁'을 벌입니다. 아누의 눈으로 불리는 세계석은 산처럼 큰데, 이걸 가지면 현실을 바꿀 수 있고 생각만으로 생명과 세계를 만들 힘을 갖게 됩니다.
이 세계석을 혼돈계에서 몰래 빼돌려 인간 세상인 '성역'을 만든 이가 있습니다. 대천사 티리엘을 섬기던 앙기리스 의회 자문관이자 천상의 군대 지휘관이던 이나리우스입니다. 오랜 전쟁에 환멸을 느낀 그는 세계석의 힘으로 성역을 창조합니다. 전쟁 포로 이나리우스와 사랑의 도피를 한 여악마 릴리트, 똑같이 전쟁에 염증을 느낀 천사와 악마들이 도운 덕분입니다. 릴리트는 증오의 군주 메피스토의 딸입니다. 평소 아버지의 미움을 받던 릴리트는 반란의 기회를 노려왔죠. 대악마 메피스토는 졸지에 천사 사위를 두게 됩니다.
이나리우스와 릴리트, 다른 천사와 악마들이 성역에서 사랑을 나눠 혼혈종 '네팔렘'을 낳습니다. 네팔렘은 오늘날 인간의 조상입니다. 네팔렘은 야만용사의 조상인 불카토스, 드루이드의 선조 바실리, 첫 번째 원소술사 에수, 강령술사의 시조인 라트마 등 반신반인의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성역의 어머니 릴리트. (사진=블리자드)
'어머니' 릴리트, 자식 살리려 동료 몰살
성역의 천사와 악마들은 자식들의 힘이 자신을 능가해 불안했습니다. 고생끝에 도망쳐 나온 천상과 지옥의 주의를 끌 위험도 있었습니다. 반역자들의 땅이 어떻게 될 지는 불 보듯 뻔했습니다.
이에 자식들을 없애자는 주장이 나옵니다. 일부는 목숨만은 살리자고 했지요. 이나리우스는 숙고할 시간을 갖자고 했는데, 눈이 뒤집힌 릴리트가 남편을 뺀 나머지 천사와 악마를 몰살합니다.
경악한 이나리우스는 릴리트를 공허로 추방하고 세계석의 공명을 바꿔 네팔렘의 능력을 서서히 퇴화시킨 뒤 종적을 감춥니다. 세계석은 이나리우스가 성역 땅에서만큼은 가공할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원천으로 남습니다.
이후 인류는 문명을 세웁니다(케지스탄력 기원전 2300년경). 이들의 제국을 '케잔'이라 부릅니다. 케잔은 나중에 케지스탄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점술과 마법도 생겼는데, 호기심이 화를 자초합니다. 비제레이 마법단의 무명 마술사 '제레 하라쉬'가 악마 소환에 성공한 겁니다(기원전 1992년). 불타는 지옥의 수장들은 이 사건으로 성역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정신 못 차린 비제레이는 더 많은 악마를 소환해 부리고픈 욕망에 빠집니다. 성역에 소환됐던 악마들은 지옥에 돌아가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네팔렘의 잠재력을 알아낸 대악마들은 인간을 이용해 영원한 분쟁의 종지부를 찍을 힘을 얻기로 합니다. 디아블로, 메피스토, 바알은 신흥 종교 '삼위일체단'을 만들어 교세를 키웁니다(기원전 1880년). 이 종교는 뻔뻔하게도 결의의 영 디알론, 사랑의 영 메피스, 창조의 영 발라를 내세워 세력을 크게 확장합니다. 디알론은 디아블로, 메피스는 메피스토, 발라는 바알의 눈속임용 이름이죠. 성역 땅에서는 메피스토의 아들이자 릴리트의 오빠인 '루시온'이 절대자가 되어 인간의 모습으로 삼위일체단을 이끕니다.
이나리우스는 삼위일체단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챕니다. 이에 수려한 외모를 가진 인간 예언자로 나타나 관용과 협력, 화합이란 교의로 전도했습니다(기원전 1820년). 케잔의 수도 케잔시에 본부를 둔 '빛의 대성당'은 삼위일체단과 함께 성역 동부를 양분합니다. 대악마와 이나리우스가 인간 영혼을 두고 벌인 영역 다툼이지요.
디아블로 세계의 배경인 인간 세상 ‘성역’ 지도. (사진=블리자드)
인간 살린 마지막 한 표
팽팽한 긴장의 끈을 가운데서 끊은 이가 있었으니, 그는 네팔렘으로 각성한 농부 '울디시안 울디오메드'입니다. 그는 민중을 억압하는 종교 따윈 필요 없다며 다른 인간들에게 잠재된 네팔렘의 힘을 깨웠습니다. 울디시안과 그의 추종자 집단 '에디렘(각성한 자들)'은 삼위일체단이 악마 루시온에게 조종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전쟁을 선포합니다. 울디시안은 교단 사원과 그 수호군인 평화 감시단을 무너뜨렸습니다.
태초의 네팔렘 '라트마'의 도움으로 세계석을 알게 된 울디시안은 네팔렘의 힘을 봉인한 이 보석의 구조를 바꿔 능력을 키웠고, 성역의 주도권을 지키려는 이나리우스와 맞붙습니다. 이를 지켜본 대천사 티리엘이 반역자 처단과 인류 말살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내려옵니다. 자신만의 낙원에서 신 놀이를 하던 이나리우스는 물론, 인간의 힘을 장악해 천상보다 우위를 점하려던 대악마들이 성역의 존재를 들킨겁니다.
이에 불타는 지옥도 가만 있지 않았습니다. 악마떼가 성역의 바닥을 뚫고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나리우스의 걱정은 현실이 됐습니다. 성역에서 천상과 지옥의 전면전이 일어난 겁니다. 울디시안은 괴력의 파장으로 천사와 악마를 각자의 땅으로 돌려보냅니다. 하지만 이 힘이 성역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천사와 악마를 밀쳤던 힘을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겨냥합니다.
참사가 끝나자, 천상의 앙기리스 의회에서 대천사 다섯명이 골칫덩이 인류의 생사를 걸고 투표 합니다. 임페리우스는 인류 말살에, 아우리엘과 이테리엘은 존속에 투표했습니다. 말티엘은 기권했습니다. 찬반 동수 득표 시 인류는 끝장입니다.
울디시안의 희생을 지켜본 티리엘은 남은 한 표를 인류의 존속에 던집니다. 놀라운 자애와 끔찍한 폭력을 모두 행할 수 있지만, 이타심과 명예, 정의를 위한 인간의 잠재력을 봤습니다. 규율에 얽매인 천사가, 우주를 법칙으로 단정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겁니다.
한편, 불타는 지옥에선 네팔렘으로 각성한 인간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이 힘을 차지하려는 욕망을 더 키우게 됩니다.
그런데 평범한 농부 울디시안은 어떻게 네팔렘으로 각성해 천상과 지옥을 위협한 걸까요. 흙에서 자란 사람들의 땅, 시골 마을 세람에서 이 소박하고 위대한 영웅의 혁명이 시작됩니다.
참고서적 ‘케인의 기록’과 ‘티리엘의 기록’, 그 외 전자책 ‘죄악의 전쟁’ 1~3권, ‘빛의 폭풍’. (사진=이범종 기자)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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