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지웅 기자] 미국이 '반중국 동참'과 '비관세 장벽 완화'를 조건으로 아시아 교역국에 압박 수위를 높이는 가운데, 일본과 베트남의 대응이 엇갈리며 한국의 선택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입니다. 일본은 '쌀 시장 개방' 요구를 끝내 수용하지 못한 채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졌고, 베트남은 중국의 '원산지 세탁'을 막고 미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전면 철폐하기로 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한국도 중국 견제, 미국산 쌀 쿼터제, 소고기 시장 개방 등을 놓고 비슷한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일본 '최악의 시나리오' 증폭…'쌀 문제' 쟁점인 이유
6일 일본 정부에 따르면, 미·일 장관급 관세협상의 일본 측 대표인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은 지난 3일과 5일 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과 전화 통화로 관세 문제를 협의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앞으로도 미국 측과 정력적으로 조율해 갈 것"이라고 밝혔지만, 협상은 사실상 '교착상태'입니다.
앞서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은 지난달 27일(이하 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러트닉 상무장관과 만나 7차 협상을 벌였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추가 협상을 위해 체류 일정을 하루 늘려 스콧 베센트 재무부 장관과 만나보려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압박성 발언이 이어졌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그들은 대량의 쌀 부족을 겪고 있는데도, 우리의 쌀을 수입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날을 세웠습니다.
그는 지난 1일 전용기에서도 "일본과 합의할지 확신을 못 하겠다"며 "그들은 매우 완고(tough)하고 매우 잘못 길들었다(spoiled)"고 직격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산 수입품에 대해 지난 4월 발표한 상호관세율(24%)보다 높은 30~35%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일본은 미 측의 핵심 요구 중 하나인 쌀 수입 확대에 완강히 반대했고, 무역적자를 해소할 구체적 해법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오는 20일 참의원(상원) 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점이 부담인데요. 미국에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것으로 비치는 합의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분석입니다.
가뜩이나 내각 지지율은 쌀값 급등 등으로 인해 부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집권 자민당의 전통적 핵심 지지층 중 하나가 '쌀 농가'이란 점은 딜레마입니다. "쌀에 손을 대면 자민당 정권은 무너진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농업을 희생시키는 일은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지켜야 할 것은 지키겠다"며 일본 정부가 버티는 이유입니다. 베센트 재무장관도 관세 협상이 진전되지 않는 배경으로 '일본 참의원 선거'를 거론하며 합의가 쉽지 않은 상태임을 인정했습니다.
실제 일본은 매년 약 77만톤(t)의 쌀을 관세 없이 수입했고 이 중 45%가 미국에서 왔지만, 이 물량을 초과하는 경우엔 킬로그램당 341엔(3200원), 227%에 달하는 고율관세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미국과 관세 협상을 이어오면서 미국산 옥수수·대두 등 농산물 수입 확대를 제안했지만, '성역'으로 간주해 온 쌀 수입을 늘리는 방안은 제시하지 않은 걸로 알려졌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일본을 본보기 삼아 다른 주요국과의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 할 걸로 보입니다. 일본 정부가 기존 전략을 고수할 경우, 미국이 일본과의 추가 협상을 포기하고, 본보기로 일본에 고율 상호관세를 부과할 가능성마저 제기됩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을 다시 미국에 보내 내주 초반께 8차 협상을 벌이는 방안을 미국 측에 타진했습니다. 일본 측은 쌀 수입 확대와 자동차 관세 모두 물러설 수 없다는 기조하에, 자국 기업 지원책을 강구하는 등 협상 장기화도 준비하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17년 베트남 하노이 국제공항에 에어포스원을 타고 도착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베트남, '대중국 견제' 동참…한국도 영향권
반면 베트남은 '대중국 견제 동참'에 이어 '비관세 장벽 완화'까지 수용해 트럼프 대통령을 흡족게 했습니다. 환적 상품(제3국이 베트남을 통해 수출하는 상품) 관세를 베트남산 수입품(20%)의 2배인 40%로 책정한 건데요. 수출 시 원산지 규정을 강화해 환적도 줄이기로 했습니다.
이는 베트남을 경유해 미국으로 유입되는 중국산 제품을 겨냥한 것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핵심 문제로 생각하는 사안입니다. 미국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 줬다는 평가인데요. 베트남은 자국 농산물 시장을 미국에 개방하는 한편, 지식재산권 침해 등 비관세 장벽도 해소하기로 약속했고, 80억달러(약 11조원) 규모의 보잉 항공기 50대도 구매하기로 했습니다.
결국 베트남은 대미 관세를 0%로 낮췄고, 미국은 베트남산 수입품에 대한 상호관세율을 46%에서 20%로 낮추기로 했습니다. 베트남이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건 최대 수출시장인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됩니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도 비슷한 요구를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올해 미 무역대표부(USTR)가 발간한 '국가별 무역 평가 보고서(NTE)'에 따르면, 한국의 미국산 쌀 쿼터제 운이 비관세 장벽 사례 중 하나로 지목됐기 때문입니다. 소고기 시장 개방(월령 30개월 이상 수입 금지)과 함께 이를 허물 경우 국내에서 상당한 사회·정치적 반발이 예상됩니다.
한국은 일본처럼 '불성실 협상국'으로 지목받는 상황은 피해야 하지만, 동시에 베트남처럼 미국 요구를 무조건 수용할 수도 없는 입장에 처했습니다. 관건은 '한·미 정상회담'인데 아직은 안갯속입니다.
당초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이 8일쯤 방한해 위성락 안보실장과 정상회담 시점을 논의할 것이란 관측이 나왔지만, 일정이 취소되면서 정상회담이 9월 유엔 총회까지 미뤄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됩니다.
미국 측이 거듭 참여를 요청하는 알래스카 천연액화가스(LNG) 프로젝트의 경우, 사업 위험성이 커 대통령 수준의 결단 영역입니다. 'GDP의 5% 국방비' 요구도 마찬가지인데요. 정상회담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관세 부과,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대 등 문제에 적시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유지웅 기자 wisema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