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리한 산재 판정)④'부실 감정' 탓에 산재 소송은 결국 '복불복'
노동차 측, 시간·비용 부담해도 대부분 '부실 감정' 받아
팩트 틀리고 연구도 왜곡…항의해야 감정 '겨우 뒤집혀'
법조계 "법원, 감정의 평가 철저히…부실 감정의 배제해야"
2025-09-17 14:00:00 2025-09-17 14:00:00
[뉴스토마토 강석영 기자] 산업재해 소송에서 노동자 측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진료기록 감정(鑑定)을 신청해도 돌아오는 건 '부실 감정'이 대부분입니다. 업무 관련성에 관한 기본적 사실관계부터 틀리거나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추측성 판단을 내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편향적 진단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노동자를 구제하지 못하는 산재 소송인 겁니다. 이런 탓에 법조계에서는 법원이 감정의(鑑定醫) 평가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업무 관련성 부인한 감정의…통계 틀리고 연구도 왜곡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2014년부터 2년가량 일했던 20대 A씨는 2021년 백혈병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사망했습니다. 유족은 고인은 포토 공정 등 업무 과정에서 각종 유해물질에 노출됐고, 과로와 스트레스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사망한 것이라면서 산재를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A씨가 삼성전자에서 근무 기간이 비교적 짧다면서 그의 백혈병은 개인적 요인에 의한 발병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유족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진료기록 감정을 하게 됐습니다. 일단 감정의는 고인과 백혈병 사망 사이의 업무 관련성을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감정의가 기본적 통계조차 틀렸다는 겁니다. A씨 측은 감정 신청에서 20대 남성의 백혈병 발병 확률을 물었습니다. 발병률 통계에 대한 사실 확인 차원이었습니다. 감정의는 "15~34세 남성 10만명당 9.2명 발생한다"면서 많이 발생하는 '다빈도 암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통계는 10만명당 4.2명으로, 감정의가 답변한 것보다 절반 수준이었습니다. A씨를 대리한 임자운 법률사무소 지담 변호사가 이를 지적하고 나서자 감정의는 뒤늦게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감정의는 유해물질 분석 결과를 왜곡하기도 했습니다. 감정의는 2009년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포토 공정에서 사용된 감광액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와 관련해 "일부 감광액에선 벤젠(발암물질)이 검출됐다"면서도 "대부분의 감광액에선 미량 수준으로도 벤젠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분석 땐 40~50종의 감광액 중 임의로 선정된 6개 전부에서 벤젠 등이 확인됐습니다. 임 변호사가 이를 지적하자 감정의는 "다른 물질에서 벤젠이 함유됐을 가능성은 높다"로 정정했습니다. 결국 법원은 감정의의 판단은 편향적·추측성이라는 임 변호사 주장을 받아들였고, 지난해 12월 법원은 유족 손을 들어줬습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지면서 반도체 공정의 직업병 논란을 세상에 처음 알린 고(故) 황유미씨 사망 11주기인 6일 오후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 관계자들이 방진복을 입고 도보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근로복지공단 옹호한 감정의…알고 보니 '공단 자문의'
 
상가 경비원으로 일하던 B씨는 2022년 2월 퇴근 후 주거지에서 뇌경색으로 쓰러졌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1년 만에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70대였던 그는 24시간 교대제로 일하며 12층 대형 상가를 혼자 지켰습니다. 상가 순찰과 청소 등 기본 업무에 주차 관리, 이용객 안내 등도 온전히 그의 몫이었습니다. 유족은 고인의 죽음이 과로사라고 주장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이를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행정소송이 진행됐습니다. 쟁점은 B씨의 근무 시간이었습니다. 고용노동부 고시는 '발병 전 12주간' 평균 52시간을 초과하면 과로라고 판단합니다. 근로복지공단은 고인이 근로계약서에 따라 발병 전 12주간 1주당 평균 33시간15분 일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B씨 동료들 고인이 평균 66시간30분 근무했다고 했습니다.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감정의는 근로복지공단의 주장을 근거로 고인의 사망은 과로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코로나19로 업무 강도가 줄고, 휴게의 질이 증가했다는 막연한 추측도 내놨습니다. 감정의는 B씨가 사망한 원인으로 고혈압 등 기저질환을 지목했습니다. 평소 고혈압을 잘 관리했다는 주치의 소견을 뒤집은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결국 지난 1월 감정의 소견 등을 근거로 B씨 유족의 패소를 판결했습니다. 
 
그런데 이 감정의는 가장 최초에 산재 여부를 판정하는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에 참여하고 있는 의사입니다. 익명을 요청한 한 산재 전문 변호사는 "감정의와 질판위 인적 구성은 상당수 겹친다"며 "감정 때 공단 주장을 쉽게 믿거나 공단 자문의 의견과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서울 시내 한 의과대학. (사진=연합뉴스)
 
돌고 도는 문제 감정의…법조계 "'법원 풀'서 배제해야"
 
산재 전문 변호사들은 A·B씨 사례처럼 부실 감정 사례가 많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뉴스토마토>가 지난 4월17일부터 5월8일까지 산재 전문 변호사 3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한 결과, '진료기록 감정의 내용 및 결론이 감정의로서 충실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물음에 응답자 72.4%(21명)는 '충실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관련 기사: (불합리한 산재 판정)(단독)②산재 변호사 10명 중 9명 "소송서 '진료기록 감정' 영향력 축소돼야"> 부실 감정 탓에 법조계엔 '감정의 블랙리스트'라는 것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부실 감정이 초래하는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감정의 소견에 따라 판결이 좌우되자 "산재 소송은 아예 '복불복'"이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한 산재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는 "어떤 의사에게 감정이 맡겨지느냐에 따라 노동자 측 운명이 달라진다. 완전 복불복"이라며 "변호사들만큼이나 판사들도 부실 감정 사례를 많이 가지고 있을 텐데, 왜 문제가 된 감정의에게 계속 진료기록 감정을 촉탁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일부는 부실 감정의를 피하는 방법까지 궁리할 정도입니다. 김두현 법무법인 여는 변호사는 "지역 법원으로 가면 감정의 풀이 적어서 '문제적 감정의'를 피하기가 어렵다"며 "수년간 한 줄 감정을 하거나 추측성 판단만 해온 감정의를 회피하기 위해 해당 병원 다른 의사에게 사감정을 받는 방법까지 썼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문제적 감정의는 법원에서 배척되지 않는 한 계속 촉탁을 받습니다. 박다혜 법률사무소 고른 변호사는 "한 감정의가 다른 사건에서 같은 이유로 감정 소견을 인정받지 못한 사례를 봤다"며 "법원은 판결로 문제가 확인된 감정의는 법원 풀에서 빼야 한다"고 했습니다. 최종연 법률사무소 일과사람 변호사도 "감정비가 오른 만큼 법원은 철저히 감정의를 평가해야 한다"며 "공정성을 위해 질판위에 참여한 의사는 법원 풀에서 빼야 한다"고 했습니다. 
 
강석영 기자 ksy@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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