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31일, 네팔 재무장관과 환경장관이 서명한 편지 한 통이 유엔 ‘손실과 피해 대응 기금’ 이사회로 발송됐다. 랑탕 리룽 빙하가 바위째 무너져 트리슐리강 100킬로미터를 쓸어내린 지 닷새 만이었다. 사망 1380명, 실종 5400명. 네팔 재난 당국이 처음 제시한 초기 복구비만 50억달러였다. 네팔 정부는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외무장관은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더 직설적으로 주장했다. 우리는 기후변화에 기여한 게 거의 없다, 오염으로 이익을 본 나라들이 책임을 나눠서 져야 한다, 최대 배출국들은 정신 차려라… SF 영화보다 압도적인 재난 장면이 네팔 대홍수의 첫 장을 열었다면, 이제는 재난의 책임을 둘러싼 지루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네팔의 논리는 단순하다. 1751년 이후 네팔이 배출한 이산화탄소는 인류 누적 배출량의 0.01%다. 반면, 미국은 20%, 중국 13%, 유럽연합 12%다. 그런데, 네팔의 산악지대 빙하는 30여년 만에 얼음 3분의 1을 잃었다.
이러한 불평등을 세계는 느린 속도이나마 인식 중이다. 2022년 파키스탄 국토의 3분의 1이 잠겼을 때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기후 재난 지원은) 관대함이 아니라 정의의 문제”라고 했고, 그해 이집트에서 열린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에서 30년을 미뤄온 ‘손실과 피해 대응 기금’ 설치가 합의됐다.
하지만, 여전히 선진국들은 손실과 피해 대응 기금에 돈을 내지 않고 있다. 약정액 8억2000만달러 가운데 납입된 돈은 4억4800만달러(약 6000억원)다. 이 돈을 전부 네팔에 쏟아부어도 네팔 정부가 추산한 초기 복구비 50억달러의 9%밖에 안 된다. 미국은 1750만달러를 약속했다가 트럼프 행정부 들어 이사회에서 아예 빠졌다. 규정에 긴급 지원 조항은 있지만, 한 번도 가동된 적이 없다. 다음 이사회는 12월이 되어서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다.
선진국이 소극적인 이유는 ‘도의’의 차원에서 기후 재난 당사국을 도울 수 있지만, ‘법적 책임’은 없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주도해 그 근거를 만들었다. 2015년 파리협정 8조에 손실과 피해가 들어갈 때, 총회 결정문에 단서가 따라붙었다. “이 조항은 어떤 책임이나 배상의 근거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유엔 문서는 ‘보상’이라는 단어를 피한다.
과학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최근 기후과학에서 성장하는 분야는 ‘기후 귀속 연구’다. 이 분야 과학자들은 폭염, 홍수, 가뭄 등이 발생했을 때, 온실가스 배출 같은 인간 활동이 해당 사건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계산한다. 각 나라와 기업의 기여량을 셈할 수 있는 것도 물론이다.
미국 버몬트주는 2024년 ‘기후 슈퍼펀드법’을 만들어 기후 피해 비용의 일부를 화석연료 회사에 물리기로 했다. 페루 안데스산맥 빙하 밑에 사는 한 농부가 독일의 최대 전력회사 아르베에(RWE)에게 홍수 예방 비용의 0.47%를 부담하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독일 법원은 홍수 가능성이 적다며 청구를 기각하면서도 기업이 배출한 만큼 책임져야 한다고 밝혔다.
앞으로 기후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같은 질문이 따라붙을 것이다. 누가 일으켰고, 누가 얼마를 낼 것인가. 발렌드라 샤 네팔 총리는 일정을 바꿔 24일 유엔총회에 나가 국제사회의 책임을 호소한다. 올해 11월 튀르키예 안탈리아에서 열리는 제31차 당사국총회(COP31)에서는 ‘손실과 피해’가 선진국과 개도국의 가장 큰 논쟁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나라는 연간 배출량 세계 10위권에 속한다. 그런데, 손실과 피해 기금에 약속한 돈은 700만달러(약 97억원)뿐이다. 1억달러 이상을 약정한 이탈리아, 프랑스, 아랍에미리트, 독일 등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내놓은 700만달러는 ‘도의의 몫’이었다. 네팔이 보낸 편지의 수신인은 기금 이사회였지만, 숨겨진 명단의 윗자리에 한국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남종영 성공회대 외래교수, 기후변화와동물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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