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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21화)"그날밤은 아름다움이었다"
들불 윤상원
2016-05-30 06:00:00 2016-05-30 06:00:00
언로가 철저히 차단되어 있던 1980년 5월 광주의 실상을 목숨 걸고 취재해 서방세계에 최초로 알린 독일 기자로, 당시 일본특파원이었던 위르겐 힌츠페터(Juergen Hinzpeter, 1937~2016)가 광주에 안장됐다는 소식이다. 2004년 5월 건강이 위독할 때 이미 광주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던 그는 2005년 광주 방문 당시 5·18 재단에 손톱과 머리카락을 맡겼다. 비록 국가보훈처가 국립 5·18민주묘지 안장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해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됐지만, 이제 광주의 영령들과 함께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게 됐다. 
 
외신기자가 본 시민군 대변인 청년
 
5월을 떠나보내기 전, 영원한 청년 윤상원을 기억한다. '5월 광주'의 아무런 진실도 보도할 수 없었던 국내기자들에 비해 외신기자들은 상대적으로―물론 종종 목숨을 걸어야 했지만―현장 접근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미국 <볼티모어 선>지의 기자 브래들리 마틴(Bradley Martin)은 최후 항전(27일 새벽)을 목전에 둔 5월26일 오후 전남도청 건물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열린 기자회견 당시 보았던 이름 모를 시민군 대변인으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는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과 함께 그 젊은이가 "스스로도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쓰고 있다.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기자회견을 하던 곱슬머리 젊은이를 잊을 수 없었던 외국인 기자는 1993년 마침내―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이 젊은이의 이름이 윤상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한국기자협회 외 엮음, <5·18 특파원 리포트>, 풀빛, 1997).
 
들불야학
 
이제는 평전이나 언론을 통해 많은 국민들에게 알려져 있는 윤상원 열사(1950~1980)에 대해 논할 때, 제일 먼저 '들불야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저 70년대 10년 동안 광주의 순정이 시작되었다 / 헌책 몇십권 가지런히 꽂혀 있는 / 야학의 방 / 거기 들불야학 / 공순이 공돌이의 방 / 학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의 방 / 형광등 불빛 이따금 꺼졌다가 껌벅거렸다 다시 켜졌다 // 열다섯 혹은 옹기종기 서른한 명 / 밤마다 / 그들을 가르치던 사람 // 술 끊었다 / 담배 끊었다 / 늘 웃었다 / 늘 사람들에게 고개 먼저 숙였다"('윤상원', 27권). 
 
윤상원은 1978년 전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대학에 보내느라 고생하신 시골의 부모님께 잠시 동안의 효도를 하고자 서울의 한 은행에서 직장생활을 하지만, 몇 달 후인 6월27일 전남대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이 발생하자 광주로 내려와 10월에 광천공단 내 한 플라스틱 공장에 취업하고, 이듬해 초부터 대학 후배인 박기순(1958~1978)의 권유로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의 강학(講學)으로 활동하게 된다. 들불야학 창립자이자 광주·전남지역 최초의 위장취업 노동운동가였던 박기순은 1978년 12월26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나, 이후 1982년 윤상원과 영혼결혼식을 올리게 되는 인물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의 일부를 인용해 황석영이 노랫말을 다듬고 전남대 출신의 김종률이 곡을 붙인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바로 이 영혼결혼식에 바쳐진 노래굿 <넋풀이 - 빛의 결혼식>에 삽입된 노래이다. 그리고 이 5월 광주의 노래는 이제 홍콩, 대만, 태국을 포함, 동남아 여러 나라들에서 민권운동을 위해 불리게 됐다.  
 
지난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광주민주화운동 36주년 기념식 자리에서 윤상원 열사 묘역을 찾은 정의화 전 국회의장. 사진/뉴시스
 
윤상원은 항쟁기간 내내 들불야학의 강학·학생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제작해 배포함으로써 시민들을 위한 언론의 역할을 하고 투쟁의 조직화를 꾀한다. '투사회보'의 제작은 들불야학교실이 있던 광천동성당에서 시작해 24일부터는 도청 앞 YWCA로 옮겨지게 된다. 윤상원은 또한, 기존의 수습대책위원회가 타협적으로 무기반납을 주장하자 이에 반대하고 새로운 항쟁지도부인 '시민·학생 투쟁위원회'를 결성해 항쟁을 이끌다가 27일 새벽 도청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그렇지 않으냐 / 아름다움이란 반드시 비극일 것 / 그렇지 않으냐 / 아름다움이란 / 그냥 아름다움이 아닐 것 / … // 여기 아름다운 사람 // 5월을 위하여 있었던 사람 / 5월 광주를 위하여 / 있다가 없어진 사람 // 곱슬머리 / 아침부터 진지한 얼굴 아니 / 저녁부터 관대한 얼굴 / 미풍에 눈 떴다 감았던 얼굴 / 그 5월 거기까지만 / 서른살 / 거기까지만 있던 사람 / 그 5월 도청 안 / 시민군 3백여명 이끌고 / 그 5월 27일 새벽 네시까지 10일간 불지른 사람 // 고아들 / 부랑자들 / 고교생들 / 막일꾼들 / 젊은이들 / 천둥벌거숭이들 / 다 떠나고 / 몇 사람밖에 남지 않은 인텔리와 마구잡이들 / 그들을 이끌었던 밤 / 그것이 생의 전부인 사람 // 계엄군 3공수의 총에 맞았다 / 쓰러졌다 / 그리고 실려가는 줄 모르고 실려가 파묻혔다 // 하나의 들불은 꺼졌다 / 그뒤 / 그 막강한 군사의 시대 / 수많은 들불이 이어져야 할 때까지 / …"('다시 윤상원', 27권) 
 
바다 파도 그대로, 오는 죽음 그대로
 
들불야학 출신으로 '들불7열사'라 불리는 이들 중 윤상원은 도청에서, 투사회보 필경을 담당했던 박용준(1956~1980)은 YWCA 건물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윤상원의 옆에 있었던 김영철(1948~1998)은 이날 체포된 이후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이상 증세와 장기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이 날 그 곳에 있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남아 항쟁 이후의 투쟁을 지속하던 들불열사들도 길지 않은 삶을 치열하게 살다가 떠났다. 전남대 총학생장이었던 박관현(1953~1982)은 5·18 진상 규명과 교도소 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40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1982년 영면하고, 청년운동에 헌신하던 신영일(1958~1988)은 1988년 과로사, '오월극'으로 광주항쟁을 알리던 박효선(1954~1998)은 1998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광주 광산구에 복원된 윤상원 열사 생가 앞에 조성된 기념비. 사진/뉴시스
 
'최후 항전'이 '죽음'과 동의어임을 알고 있던 윤상원의 마지막 밤은 <만인보>에서 이렇게 묘사된다. "그날밤은 아름다움이었다 길고 긴 무슨 아름다움이었다 // 친구에게 말했다 / 나 유치하단다 / 해파(海波) / 바다 파도라는 호를 가지고 있단다 // 5월 26일 그날밤 무지무지하게 길었다 // 5월 그날을 위하여 / 광주 그날 / 민주 그날을 위하여 / 그가 왔다 / 5월 그날을 위하여 / 그가 갔다 // 그날밤 윤상원은 빈속이었다 / 가거라 / 가거라 했건만 / 가다가 끝내 돌아와버린 소년에게 / 남은 라면을 먹이고 빈속이었다 // 그날밤 자정 / 그날밤 자정 넘어 / 그 어둠속에서 / 전남도청 / 민원봉사실 2층 / 도청 회의실 거기 // 그날밤은 아름다움이었다 // 이양현 / 김영철과 함께 있었다 / 윤상원이 말했다 / 우리는 지금 패배할 수밖에 없지만 / 역사 속에서 / 우리가 영원히 승리하기 위해서 / 끝까지 이곳을 사수해야 한다 / … / 영철이 끄덕였다 / 양현이 어둠속 눈물 그렁 고개 끄덕였다 아름다움이었다 // 그날밤이 갔다 / 신새벽 네시 / 도청 뒷담 넘어 / 명사수 / 특공대의 집중사격 개시 // 윤상원 복부 관통 / 양현이 / 영철이 / 커튼을 찢어 감쌌으나 / 다시 수류탄 작렬 // 그날밤은 무슨 아름다움이었다 // 놀라운 것은 / 윤상원의 총은 / 단 한발도 쏜 적 없이 / 총탄 장전 그대로 / 방아쇠 당긴 적 없이 / 오는 죽음을 그대로 맞아들였다 // 윤상원의 총은 총이 아니라 / 5월의 상징 / 5월 광주의 의미 그것 / 그것은 끝까지 쏴버리지 않은 아름다움이었다 바다 파도였다"('바다 파도', 30권). 
 
윤상원은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도청에 있던 여자들과 고등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데, 이 때 그가 한 말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그렇게 윤상원은 보낼 사람들을 보내고 자신은 남아 "넝마주이 / 막일꾼 / 구두닦이들뿐"인 "남은 시민군"과 함께 "곧 닥쳐올 / 죽음의 어둠을" 보았다('죽음의 행진', 28권).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채, 내일의 역사 속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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