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44화)백성을 버린 지도자 vs 나라를 구한 백성
“어찌 뜻있는 자 일어서지 않으랴”
입력 : 2016-12-05 06:00:00 수정 : 2016-12-06 09:15:42
 지난주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가 가져온 파장으로 인해 이른바 ‘비박세력’은 국민을 배신해 돌아서고, 정치적 계산에 바쁜 야당들의 갈팡질팡한 행보 속에 대통령 탄핵안의 2일 국회 본회의 처리는 무산되었다. 심지어 여당의 한 국회의원은 민의를 무시한 채 자신에게 항의문자를 보낸 국민들을 ‘홍위병’에 비유하며 ‘대중선동정치’ 운운하는 작태를 보였다. 자신의 범죄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지극히 무지하고 교만한 대통령과 그의 무리들, 국민의 세금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국민의 대리인임을 망각한 국회의원들, 그들로부터 나라를 구하느라 주권자인 국민들은 6주째 거리로 나가고 있다.
 
선조와 이승만의 공통점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선조가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비록 ‘몽진(蒙塵)’이라는 표현으로 포장되기는 하나―을 가버린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일본군은 부산포에 상륙해 빠른 속도로 북진을 한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충주에서 패전 보고가 오자 왕이 대신과 대간(臺諫)을 불러 파천(播遷)에 대해 먼저 발의를 하였다. 이에 영의정 이산해를 제외한 모두가 왕의 파천을 반대했지만 결국 파천이 결정된다(<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 4월 28일). 다음날 선조는 자신을 찾아와 통곡하는 종실(宗室) 해풍군 이기 등 수십 명에게 "가지 않고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칠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 이튿날 새벽 먼지(塵)를 뒤집어쓰는(蒙) 길을 떠나고 만다(앞의 책, 선조 4월 29일, 30일).
 
조선 국경 성읍 의주 여기까지
한양 대궐에서
백제
평양 거쳐
압록강 기슭
의주성에까지 도망쳐왔다

왕의 도망이므로
도망이 아니라
몽진(蒙塵)

임진왜란의 왕 선조
이곳에서
압록강을 건너려 하였다

과인의 목숨
차라리 천자의 손에 죽고 싶다
왜적의 손에 죽고 싶지 않다
강을 건너야겠다
어서 서둘러라

이때 호종하는 세 정승이
왕을 만류하였다

상감마마 강을 건너시면
상감마마와 나라와 인민을 내버리는 행실
필부의 행실이 되고 맙니다

< … >
(‘의주’, 26권)
 
 <선조실록>의 임진년 4월 30일자 기록을 보면, 저녁때 임진강 나루에 다다른 왕이 배를 타고 밤에 동파(東坡)에 도착하자, 적병이 뗏목으로 이용할까 두려워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도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人家)마저 철거시키도록 명했다고 쓰여 있다.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느라 백성이야 강을 건너든 말든 개의치 않은 대단한 왕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겹쳐지는 장면이 바로, 국민을 팽개치고 도망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다.
 
< … >
이승만 대통령
장관들
군대들까지
140만 시민을 놔두고 떠나버렸다

동요하지 말라
동요하지 말라
곧 격퇴시킬 것이다
격퇴시켜
평양에 가서 점심 먹고
신의주 가서 저녁 먹을 것이다
이런 호언장담 뒤 줄행랑으로 떠나버렸다
< … >
(‘신건호 혹은 신동문’, 16권)
 
이승만 옹 도망가는 데는 신속했다
미국 대사 무초보다
하루 먼저
서울을 몰래 떠났다
< … >

수원이 위태롭자
대전을 버리고
대구로 갔다

국민을 서울에 놔두고 혼자 왔다
아직 대통령 서울에 있다고
국민을 속이고 왔다 
독립운동도 그렇게 했는가
불안한 씨베리아
만주
중국이 싫었다
안전하고 부유하고 멀찍이 떨어진 큰 세상 미국으로 갔다
< … >
(‘석낙구’, 18권)
 
 1950년 12월 중공군이 밀려오자 평양을 포기하고 후퇴를 결정한 미군은 자신들만 철수하고 중공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대동강 철교를 폭파해 버린다. 헌병사령관 김종원은 당시 정훈장교이던 선우휘(1922~1986)에게 “평양시민의 피난을 엄금”하고 “작전상 일시후퇴니 안심하라 / 후퇴하거나 / 피난 떠나면 총살이다”라는 요지의 포고문을 인쇄ㆍ배포하라 지시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이미 후퇴하던 유엔군이 파괴한 / 대동강 다리에 / 가교를 놓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평양의 “시민들을 철수시키게 된다”(‘선우휘’, 18권).
 
‘이몽학의 난’ 또는 민중 봉기
 임진왜란(1592~1594)과 정유재란(1597~1598)의 사이이던 1596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에 대기근까지 겹쳐 굶어죽고 얼어죽는 백성들이 많았다. 그나마 백성들에게 배급된 곡식도 벼슬아치들이 빼내어가니, 살아남기 위해 도적이 되고 도탄에 빠진 농민들이 그해 7월 이몽학이 일으킨 군사에 가담하게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몽학군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짧은 기간 안에 홍산, 임천, 정산, 청양, 대흥을 점령한다. 수천의 군사로 불어난 이몽학군이 홍주성을 공격하지만, 그에게 두 첩자를 보내 시간 끌기에 성공한 홍주 목사 홍가신은 여러 곳에 지원 요청을 하여 군대들이 속속 도착하게 된다. 이몽학은 결국 진압군의 설득에 넘어간 부하 장수들에 의해 목이 베어지고 봉기는 진압되고 말았다.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에서의 이몽학(왼쪽). 사진/뉴시스
 
1596년 충청도 부여땅
홍산 추영산 도천사에서
중 능운화상과 더불어
7백 장정을 뭉쳐 일으켰다
그가 이몽학

임진란에
의병장 한현의 휘하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선봉장으로 왜군과 싸워
그 이름 혁혁하더니
그 싸움의 나날로 하여금 깨쳐
외적의 발호는
조정의 문란에 있음이여
왜군과 조정 함께 침으로써
거기 온전한 세상 있나니

백성을 수화에서 구하고
나라를 바로잡기 위하여 일어섰나니
무릇 충의 있는 장부는 모여들지어다

이렇게 하여 7백 장정이
1천여 장정 되어
몇고을을 치고
현감 군수 사로잡고
그길로 한양으로 향하여 나아갈 터

그러나 홍주성 싸움에서 물러나
길 굽혀 덕산으로 나아갔다
거기서 관군의 현상에 혹한 자 부하한테
단칼 목 잘리고 말았다
멀리서 형세 살피던
동지 한현도 붙잡히고 말았다

< … >

망해야 할 나라
백성의 도탄으로 긴 세월을
나라라고 이어가나니
어찌 뜻있는 자 일어서지 않으랴
어찌 캄캄한 밤 횃불 아래
칼 뽑아 맹세치 않으랴

그렇게 일어선 자 쓰러지고 쓰러진
이 나라가
어찌 풀벌레소리뿐이랴
귀 가다듬건대
풀벌레소리 그 가운데
뭇 장정의 함성 하도 하도 묻혀 있을 터
(‘이몽학’, 5권)
 
 굶주린 농민, 차별 받던 서얼, 노비, 승려들이 가담했던 이 민중봉기의 실패는 당쟁에 얽혀 김덕령, 곽재우, 홍계남 같은 의병장들까지 잡아들였으니, 민심을 우롱하는 독단적인 국정운영방식이나 정치적 이해관계로 백성(국민)을 배신하는 작태가 1596년의 병신년이나 2016년의 병신년이 닮은꼴이다. 굶주린 백성들이 어쩔 수 없이 도적이 된 것을 두고 "풍문에 들으니 경기(京畿)와 양호(兩湖) 등에 토적(土賊)이 도처에 모여 있는데 관군(官軍)이 토벌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바로 겨드랑이에 난 질병과 같아 작은 걱정이 아니다“라고 한 선조는 투항한 왜군으로 ‘투순군(投順軍)’을 조직해 백성인 토적을 치게 하니, 이에 사신(史臣)조차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다. ”난리의 폐해로 많은 백성이 생업을 잃고 일어나 도적이 되었으나, 어찌 그들의 본심이겠는가. 국가에서는 안정시켜 모아서 무마할 계책은 생각지 아니하고, 투항한 왜병을 동원하여 불쌍한 백성을 주살하려고 하니 불가한 일이 아닌가.“(<선조실록> 권56, 선조 27년 10월 18일) 
 
나라를 구한 백성들
 <만인보>의 시인이 피력하기를, “선조는 망해야 할 임금이었다 / 선조 때는 나라가 새로 서야 할 때였다”(‘영창대군’, 3권)라고 했는데, 이를 오늘날로 바꾸면 “박근혜는 하야해야 할 대통령이었다 / 박근혜 때는 정부가 새로 서야 할 때였다”쯤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나라를 구한 것은 농민 다수로 구성된 의병들이었고 천대받던 승병들이었으니, “승병 5백을 모아 / 청주 지경 되찾고 / 금산땅에 뻗쳐 나가 / 왜놈 코바야까와 부대와 격전을 치”른 영규스님, 서산대사의 제자로 의병장 조헌의 “7백 의병과 함께 / 싸우다가 / 싸우다가 / 피 쿨쿨 퍼부어 죽”은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1592)가 그 대표적 인물 중 한명이다.(‘영규스님’, 1권)
 
 한편,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도 부정·부패하고 외세의존적이며 무능하기 그지없는 조선의 봉건지배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한 민중의 항거였고, 이후 항일의병운동으로 나아가는 토대가 되었던 바, 다음의 시는 요즘 시위 현장에서 마주치는 많은 청소년들에 대한 미안한 심정을 상기시킨다.
 
1894년 5월
갑오농민전쟁 당시
동학교도로 된
특공대 사생대(死生隊)
이 사생대는 
죽어야 산다라고
이미 목숨을
내놓은 청장년 77인으로 이루어졌다

놀라워라

이 동학 사생대 대장
열네살의 어린이였다

천문 지리에 통달하여
< … >
신으로 추앙받는 어린이였다

전라감사 초토사의 상계(上啓)에는
동학대장 이소년(李少年)이라 하였다

남도 장성 외곽
관군 왜군 연합토벌 전투에서
이윽고
소년대장이 쓰러졌다
누군가가 그 시신을 업고 시부저기 사라졌다
(‘한 소년대장’, 26권)
 
 
 한 원로 문인은 2016년 대한민국의 시민의식이 낳은 자유롭고 질서 있는 촛불시위를 “일사불란한 통제 상태”로, 북한의 ‘아리랑 축전’식으로 느꼈다는 누군가의 의견을 신문 기고에 썼다. 또 누군가는 이제 100만을 훌쩍 넘어 전국 200만 이상으로 가버린 집회의 참가자들을 일당을 받고 나온 아르바이트생쯤으로 생각하는 시대착오적인, 관제데모 시절의 의식 수준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동네 시장에 간다면 가게에 붙여놓은 “가훈: 하야만사성”이라는 글씨를 볼 수도 있고, 집회에 나간다면 수많은 중고생들과, 심지어 6-7세 정도로 보이는 어린이들이 엄마아빠에게 “하야가 뭐야?”, “탄핵이 뭐야?”라고 묻는 장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려야 할 이 12월의 밤에.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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