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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46화)10·26의 역설, 그 정당한 평가를 위하여
“떠돌아라 그대 영원한 대한민국 중음신으로”
2016-12-19 06:00:00 2016-12-19 06:00:00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 등장하는 문구인 “브루투스, 너마저”가 종종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이 작품이 기원전 44년 로마의 정치상황과 권력을 둘러싼 인물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인간사회의 한 보편성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극 안에서의 브루투스는 로마시민들 앞에서 자신이 카이사르(Caesar)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죽였음을, 즉 공화제 수호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연설하지만, 유신정권의 심장을 저격한 인물은 국민들과는 차단된 채 부당한 재판정에서 오롯이 자신의 진의를 주장해야 했다.
 
유신시대 중앙정보부장의 딜레마
카이사르의 암살자들 가운데 그가 아끼던 최측근 브루투스가 있었고, 브루투스는 그와의 친분에도 불구하고 종신독재관이 된 카이사르의 권력에 대항해 공화정―당시는 원로원 의원들의 귀족정치였다―의 복고를 꾀하려 했다. 형태상의 유사성 때문에, 박정희와 그를 암살한 측근 김재규의 경우를 이에 빗대기도 하지만, 이는 민중의 편에 서서 여러 개혁정책을 실시한 카이사르에 대한 모독이다. 일본 ‘황군의 마지막 장교’라는 별칭이 붙는 박정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유신독재의 칼날로 베고 찔렀는지, 절대권력에 취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을 이른바 ‘궁정동 안가’에서 농락했는지 생각한다면 ‘독재자’라고 해도 ‘급’이 다른 카이사르의 입장에선 매우 불쾌할 일이다. 카이사르는 민심의 지지를 받았지만 박정희는 민심의 원성을 샀다.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는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처럼 여럿이 모여 미리 의논한 것이 아니라, 암살 직전 자신의 부하 두 명―중앙정보부 소속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과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대통령 경호원들의 제압만을 지시해 실질적으로는 단독 결행을 한 셈이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박정희의 5·16 쿠데타를 본떠 권력을 온전히 장악하려는 음모 속에서 김재규의 암살 의도를 철저히 왜곡했다. 즉 그가 대통령 경호실장이던 차지철과의 경쟁구도에서 밀린 열등감과 박정희로부터 업무수행상의 질책을 받은 불만감에 권력을 탈취하고자 암살을 저질렀다고 국민들의 의식을 호도한 것인데, 많은 국민들이 오랫동안 그와 같이 믿게 된다. 그러나 변호인에게 말하고 옥중일기에 쓰고 법정에서 진술한 것처럼, 김재규가 ‘정치적 살인’을 행한 이유는 그가 여러 차례 충정 어린 건의를 했지만 결국 박정희가 ‘건의’나 ‘설득’에 의해서는 결코 유신체제로부터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979년 12월 18일 1심 구형공판에서 행해진 그의 최후진술 중 다음의 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현 대통령이 최근 자신의 탄핵에 대항하는 방식을 상기시킨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만둬야 할 때 그만둘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절대로 그만두시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방어를 해냅니다. 많은 희생자가 나도 자유민주주의는 회복되지 않습니다. 본인은 이걸 알기 때문에 유신체제를 지탱하는 지주의 역할을 했던 저이지만, 더 이상 국민들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사회의 모순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뒤돌아서서 그 원천을 두드린 겁니다.”( 문영심,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 김재규 평전>, 시사IN북, 2013, 242쪽)
 
캄보디아 폴 포트 정권인가
크메르 루주인가
그자들은
A B C D 등급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죽였사옵니다
몇백만명을 그렇게 죽였사옵니다
< … >
 
각하의 대한민국에서
감히
각하를 거스르는 자라면
몇만명쯤
아예 없애버리면
소위 반체제인사라는 자들
그뒤로는 씨도 없게 될 것이옵니다
 
각하! 성은이 망극하게도
고개만 한번 끄덕여주시기 바라옵니다
(‘차지철’, 10권)
 
김재규의 법정진술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경호실장 차지철이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을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냐고 했다는 말은 잘 알려져 있다.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앞의 책, 171쪽)라고 자신만만해 하던 박정희는 그를 최측근에서 바라본 김재규의 눈에 “자유민주주의 회복과 자신의 희생을 숙명적 관계로 만들어놓”은 인물이었기에,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서는 각하께서 희생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앞의 책, 240쪽). 그의 이러한 생각과 결행은 여러 해에 걸친 숙고 끝에 나온 것이었다.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김재규는 곧 그것이 그가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에 위배된다는 판단으로 처음 대통령 암살을 생각하게 된다. 그 이후에도 몇 차례 고려하였으나 망설임으로 결국 결행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김재규의 긴급조치 해제 건의를 번번이 묵살하고, 한 달에 열흘 가량은 이른바 ‘소행사’ㆍ‘대행사’를 벌여 강제로 차출된 젊은 여성들과 술자리ㆍ잠자리를 가졌으며,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의 증언에 의해 알려진 바와 같이 집무실에서 일본군 장교 복장으로 말채찍을 들고 있을 정도로 황군시절의 향수에 젖어 있던 ‘박정희 각하’를 김재규 장군은 ‘대의’를 위해 살해함으로써 국민들의 숨통을 틔워 주었다.
 
 
졸속 ‘쪽지재판’ 뒤의 전두환 신군부
1979년 12월 4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열린 1심 1차 공판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부탁한 여러 인권변호사들과 자원한 변호사들까지 합쳐 총 21명이 김재규의 사선변호인단으로 구성되었으나, 12월 11일 4차 공판 때 몇 가지 이유로 인해 김재규가 사선변호인단을 거부함으로써 국선변호인으로 바뀌었다. 김재규를 비롯한 관련자 전원을 빨리 사형시키고 싶었던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초고속으로 재판을 진행시켰는데, 12월 4일 1차 공판이 열린 이래, 17일 8차 공판, 18일 구형공판, 20일 선고공판이 열릴 때까지 16일 동안 총 10차례의 공판이 열린 셈이다.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특히 김재규가 최후진술을 할 때는 국가기밀이 공개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재판부가 방청객들을 내보내 그는 자신의 가족과 재판부, 검찰관, 변호인들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언을 하게 된다.
 
10·26 사건 재판의 첫 번째 문제점은 이 사건이 계엄 선포 이전에 행해진 민간인의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군법회의가 재판권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둘째로, 재판관할권에 대한 변호인들의 재정신청은 물론, 검찰관의 분리신문과 녹취금지에 대한 이의제기, 공판조서 열람청구, 현장검증신청, 증인신청도 다 무시되었으며 증거신청은 기각되었다. 셋째, 이 재판은 ‘쪽지재판’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전두환이 지휘하는 계엄사령부의 합동수사본부 관계자들이 재판 내용을 동시에 확인하면서 수시로 재판부에 쪽지를 보내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넷째, 김재규 장군과 그의 부하들에게 씌워진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죄는, 그들의 행위가 내란죄의 구성요건, 즉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케 하는 것’을 충족시키지 않으므로 해당사항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몇 달 후 광주학살을 자행하고 제5공화국의 대통령이 될 집권 시나리오를 가진 자에게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국가보위상임위원장 전두환
소장에서 중장
드디어
중장에서 대장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별이 번쩍번쩍 붙는다
 
이제 하나가 더 남았다
대통령이라는 별이
저쪽에서
저벅저벅 군홧발로 오고 있다
피를 먹고
보무당당하게 오고 있다
 
< … >
(‘정진경’, 27권)
 
선고공판의 판결문에 ‘대역죄’, ‘시해’ 같이―왕권 침탈이나 부모 또는 임금을 죽였을 때 쓰이는―시대착오적인 용어를 고의적으로 사용한 것도 이 재판을 어떻게 몰고 가고자 했는지 재판부의 의도와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김재규 장군, 박흥주 대령, 박선호 과장, 유성옥 경비원, 김태원 경비원, 이기주 경비원은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다. 현역군인인 박흥주는 단심재판이라 그대로 처형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항소심으로 가게 되는데, 항소심에서는 김재규가 사선변호인 선임에 동의하여 국선변호인이었던 안동일을 포함해 강신옥, 홍성우, 황인철, 김제형, 이돈명, 조준희의 7인이 변호를 맡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김재규가 항소이유보충서에서 ‘구국여성봉사단’의 부정과 최태민ㆍ박근혜 사이의 관계, 그리고 박지만의 육사 생도시절 문제행동들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이다. 항소심 재판 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구명운동이 벌어졌으나 김재규가 믿는 우방 미국은 이 10·26 관련자들을 외면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관련자 김재규(전 중앙정보부장) 피고인이 육군본부 계엄 보통군법회의(재판장 김영선 중장)에서 선고공판을 받기 위해 포승에 묶여 걸어오며 웃고 있다. 이날 김재규, 김계원, 박선호,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등 7명은 내란목적살인죄가 적용돼 사형을 선고 받았다. 사진/뉴시스
 
역사가 요구하는 10·26의 재평가
1980년 1월 21일 항소심 첫 공판을 하루 앞두고 김재규를 접견하고 돌아온 강신옥 변호사는 자신의 ‘사건일기’에서 김재규가 명예욕은 있지만 사리사욕은 없는 인물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는 나에게 양심과 직책 사이에서 고민했으며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넣어야 하는 자기의 처지에서 이율배반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 … > 그는 어찌 보면 너무 단순한 사람이다. 국민들이 그의 거사를 무조건 환영하고 칭찬해 줄 것으로 믿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 대해서 관대하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배신은 좋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앞의 책, 261-262쪽)
 
사실, 국민들은 유신독재의 폭압에 시달렸으나 독재자의 죽음에는 애도가 넘쳤다. 어쨌든 김재규의 ‘거사’는 긴급조치 9호를 해제시켜 김대중의 가택연금이 풀리고 문익환 목사, 함세웅 신부 등 68명의 긴급조치 위반자가 석방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유신의 장막에서 한 걸음 벗어난 정치권과 국민들이 그를 환영하고 칭찬한 것은 아니었다. 카이사르를 죽이기만 하면 원로원 의원들과 로마시민들이 독재자로부터의 해방을 환영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후속조치를 준비하지 않았던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처럼, 김재규도 비슷한 낙관 속에 구체적인 후속조치의 준비 없이 ‘10·26 혁명’의 과업수행을 기대했던 것이다.
 
1979년 YH사건과
부산마산항쟁을 겪으면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그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차지철을 쏘았다
그리고 박정희를 쏘았다
 
그는 육군을 휘어잡지 못했다
육군교도소 특별감방 제7호실
그 창 없는 감방에서
여름날 새벽
육군교도소 소장이 주는 커피 한잔
그것으로 서대문에 가서
목매달렸다
염주 가까스로 쥔 채
 
걸걸한 목소리
얼얼한 얼굴
몸에는 의리 가득한데
몸속에는 참을 수 없는 배역의 폭발이 있었던가
미국을 너무 믿었던가
 
종신 대통령 박정희의 고향이 그의 고향
그의 고향 선산의 조상 무덤들 다 파헤쳐졌다
< … >
떠돌아라 그대 영원한 대한민국 중음신으로
(‘김재규’, 13권)
 
김재규가 최후진술에서 밝힌 ‘10·26 혁명’의 목적은 자유민주주의의 회복, 보다 많은 희생을 방지, 적화 방지,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 회복과 협력을 통해 국익을 도모, 국제적으로 갖고 있는 독재국가의 나쁜 이미지를 씻고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10·26 혁명’의 결행 성공과 더불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해결이 보장되었다, 라면서도, 혁명과업은 손대지도 못한 채 50여일이 흘렀다, 장장 19년 동안 쌓인 이 나라의 많은 쓰레기를 설거지해야 한다, 라고 강조하고 있다(앞의 책, 242-243쪽). 이러한 그의 생각을 고려할 때, 김재규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거의 그 존재를 찾아볼 수 없는 ‘진정한 보수’에 가까워 보인다(그런데 사실 쓰레기는 5·16 쿠데타부터 19년 동안 쌓인 것이 아니라 친일파 이래로 쌓인 것이다).
 
유신권력의 핵심부에서 그 안의 과녁을 쏘아버린 사람의 역설은, “각하의 무덤에 올라설 정도로 아직 내 도덕관은 타락되어 있지 않습니다”(앞의 책, 242쪽)라는 그의 말에서도 나타난다. 그것은 그의 처지가 가진 이율배반적 성격이고 한계이기도 하지만, 유신의 폭압에 시달리던 우리 국민들이 그에게 빚을 진 것은 사실이다. 유가족에게 충심으로 사과하고 사형집행관 앞에서도 자신의 부하들은 아무런 죄가 없음을 강조하며 그들을 구하지 못한 미안함을 드러낸 김재규 장군과, 명령을 따르느라 졸지에 역사적 사건에 연루되고도 상관을 원망하지 않고 상관만큼 의연한 모습으로 사형을 당한 5인에 대한 재평가와 명예회복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는 ‘하늘이 심판하는 제4심’을 믿으며 떠나갔지만, 그 제4심은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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