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규제는 시장 실패를 바로잡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플랫폼 산업처럼 변화 속도가 빠른 시장에서는 규제의 강도보다 규제의 타이밍과 방식이 더 중요하다. 잘못 설계된 규제는 불공정을 해소하기는커녕 혁신과 경쟁까지 함께 위축시키는 '규제의 함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달 배달앱 플랫폼 기업인 배달의민족과 쿠팡이츠가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사건에 대해 제출한 동의의결 신청을 기각했다. 양사는 3600억원 규모의 상생안을 제시했지만 공정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의의결은 장기간의 법적 다툼 대신 당사자의 합의로 피해 회복과 시장 개선을 앞당기기 위한 우회로다.
하지만 이번 동의의결 신청이 기각되면서 본안 심의를 통해 위법 여부가 가려지게 됐다. 시장지배력을 남용했다면 당연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시장지배력을 이용해 입점 업체나 소비자의 선택권을 제한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플랫폼 기업도 예외는 될 수 없다.
동의의결은 기업에 면죄부를 주는 제도가 아니다. 신속한 시정과 소비자 피해 회복을 유도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다. 장기간 이어지는 법적 다툼 대신 경쟁 질서를 빠르게 회복시키자는 것이 본래 취지다. 공정위가 이 제도의 활용 가능성을 좁혀버린 점은 아쉽다.
일각에서는 공정위의 이번 판단이 플랫폼 기업과 소상공인이 자율적으로 시장을 개선할 기회를 막았다는 비판도 나온다. 동의의결을 통한 신속한 지원이 가능했음에도 장기간 법적 다툼을 선택하면서, 생존 위기에 놓인 자영업자들의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것이다.
지난해 폐업을 신고한 사업자는 100만명에 육박하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자영업자들이 안고 있는 대출 잔액은 1000조원을 넘겼고, 지난 5월 국내은행 자영업자 연체율은 13년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치솟는 물가와 좀처럼 살아나지 못하는 소비심리 속에서, 최저임금 부담까지 가중되며 골목상권의 자영업자, 가맹점주, 대리점주들은 벼랑 끝에 서 있다. 당장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숨통을 틔워줄 수 있는 실질적인 지원책이지 엄벌주의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공정위의 플랫폼 정책이 '시장 교정'보다 '강한 제재'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플랫폼 산업은 제조업과 다르다. 네트워크 효과를 기반으로 성장하고, 서비스와 기술은 실시간으로 변화한다. 경쟁의 상대도 국내 업체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 몇 년간 글로벌 플랫폼 기업이 막대한 자본과 물류 인프라를 앞세워 국내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플랫폼 산업은 네트워크 효과를 기반으로 성장하는 만큼 규제가 사업 모델 자체를 위축시키면 혁신도 둔화될 수 있다. 더욱이 국내 플랫폼은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는 동시에 국내의 촘촘한 규제까지 감내해야 하는 이중 부담을 안고 있다.
장기간 이어지는 법적 다툼이 반복되는 점도 문제다. 국회에 제출된 자료를 보면 2016년부터 2025년까지 10년간 공정위가 기업에 환급한 과징금은 355건, 8714억원에 달한다. 특히 2024년 한 해 공정위가 기업에 부과했다가 다시 돌려준 과징금 환급액은 1319억원을 기록했는데, 1년 전보다 73% 급증한 수치로 1년치 과징금의 44% 규모다. 거둬들인 과징금의 절반 가까이 다시 돌려준 셈이다. 환급 사유의 90% 이상은 행정소송 패소다.
문제는 소모적인 소송전이 진행되는 동안 실질적인 피해자인 영세 자영업자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된다는 것이다. 수년 뒤 과징금이 대폭 줄거나, 취소 판결이 나면 공정위가 목표했던 시장 구조 개선이나 불공정 관행 개선 등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동의의결을 통한 조기 시정과 피해 회복이라는 유인은 약해지고, 규제기관과 기업 간 대립만 길어질 수 있다. 결국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소비자와 소상공인이다. 공정한 시장 질서는 제재의 강도가 아니라 시장 회복의 속도에서 완성된다. 이는 규제 혁신도 살리면서도 시장의 불공정을 바로잡는 균형감각에서 비롯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규제가 아니라 더 정교한 경쟁 정책이다.
이혜현 기자 hyu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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