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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84화)깨어 있는 성직자의 길
“옛날에는 목제 성찬배와 같은 성직자가 있었으나”
2017-10-23 08:00:00 2017-10-23 08:35:44
영화 <미션>(1986)은 스페인-포르투갈의 식민지 국경 설정에 따라 삶의 터전을 잃게 된 남미의 원주민 과라니족이 양군에 맞서 싸운 과라니 전쟁(1754~1756)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들의 거주지를 선교마을로 만들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실제에서는 교회의 명에 따라 다 철수했지만 영화에서는 몇몇이 남아 과라니족과 운명을 함께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가 과라니족을 주체적으로 그리지 못하고 서구중심주의로 흐른 것은 비판할 일이지만, ‘비폭력’으로 저항한 가브리엘 신부나 원주민과 함께 무기를 든 로드리고 수사나, 방법은 달라도 십자가가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야 함을 보여준 것은 의미 있다 하겠다.
 
영화 '미션' 속에 등장하는 가브리엘 신부와 과라니족 모습. 사진/인터넷무비데이타베이스(IMDB)
 
시대의 부름에 응하다
"정의는 하느님의 특성을 드러내는 대표적 특성으로 영원불변의 가치입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정의구현사제단’)이 스스로를 소개하는 글의 첫머리이다. 한국사회의 정의·평화·인권·민주·통일을 지향해 온 정의구현사제단의 시작은 1970년대 유신정권의 폭압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우던 초대 원주교구장 지학순(1921~1993) 주교의 구속에서 비롯되었다.
 
강원도 두메산골 사람들에게
그의 몸이 바쳐져
어느덧 그도 두메산골 사람이었다
평안도 장부 하나
잔재주라고는 통 모르고
 
주교관 마당에서 소주 마시며
박정희를 서슴지 않고
개새끼라고 퍼부어대는 두메산골 사람이었다
 
사랑과 연민으로도 힘차고
분노로도 힘찼다
 
천주교 원주교구는
몇번인가는 싸움의 발상지였다
시위대열 복판
항상 그가 있었다
 
< … >
 
그러나 치악산 긴 자락의 먹밤에는
그는 병과 기도가
그의 동지였다
(‘지학순’, 12권)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의 편에 서서 민주화 운동가와 수배자들의 보호자가 되어준 것으로 유명한 지학순 주교는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인 김지하에게 돈을 주었다는 이유로 1974년 7월6일 체포된다. 박정희 정권은 김수환 추기경과 교황대사의 방문으로 지학순 주교를 곧 풀어주고 성모병원(현 가톨릭회관)에 연금하지만, 그는 병원의 성모상 앞에서 유신헌법이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된다는 ‘양심선언’을 한다. 이 양심선언이 7월23일 발표되고, 다시 체포된 지학순 주교가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자, 1974년 9월23일 젊은 사제들을 중심으로 신부 300여명이 모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된다. “인간의 위대한 존엄성과 소명을 믿는”(‘제1시국선언’, 1974년 9월26일) 사제들이 모인 곳,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사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될 단체가 마침내 탄생한 것이다.
 
1974년 7월23일 '양심선언' 을 하고 있는 고(故) 지학순 주교. 사진/뉴시스
 
민중의 가슴에 새겨진 ‘우리 신부님’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굵직굵직한 사건과 성과들에는 항상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이 있었다. 사제단의 후배 사제들을 대표해 위험한 일을 맡고 종종 ‘방패막이’ 역할을 했던 분이 고(故) 김승훈(1993~2003) 신부이다. 1976년 3월 1일 신·구교 합동으로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 미사에서 강론을 맡은 그는, 유신헌법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구속자 석방과 유신정권의 종식,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는 용감한 발언으로 이를 미처 예상치 못했던 청중들을 감동시키며 연이어 발표된 ‘3·1 민주구국선언’을 뒷받침했다. 1987년 5월18일 역시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추모미사에서, 여러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준비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폭로하는 성명서를 읽은 것도 김승훈 신부였다. 이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다.
 
그에게는 기교 없는 부권(父權)이 있다
그래서 신부인가
 
사나운 적이 있었던가
없다
거만한 적이 있었던가
없다
 
그런데도 그의 앞모습은
잔뜩 흐린 날
사나운 개를 부르고 있었던가
 
마음은 달 떠오르는 정한인데
겉으로는 무뚝뚝
하지만 천주께서는
이런 사람이
맨바닥에 무릎 꺾어 바치는
짤막한 기도를
< … >
무척이나 좋아라 하신다
 
있는 안주 다 내놓는 쓸쓸한 포구의 술집인 양
(‘김승훈’, 10권)
 
김승훈 신부는 23세에 최연소 사제가 되었으나, 신당동 성당 보좌신부로 첫 미사를 집전한 이듬해인 1963년 9월25일 연탄가스 사고를 당한다. 20여일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나 온전히 회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상인’으로 간주하지 않는 교회와 사람들에 의해 젊은 사제는 ‘연탄가스 신부님’이라는 별명과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오해와 따돌림을 받게 된다. 점점 위축되어가는 마음으로 몸의 건강까지 해쳐 폐결핵에 걸린 김승훈 신부가 다행히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은 부산 태종대 공소의 가난하고 순수한 신도들을 만난 덕분이었다. 이들로부터 ‘우리 신부님’이라 불린 김승훈 신부는 그들의 곤곤한 삶을 함께 나누고 함께 아파하면서 사회문제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된다. 무뚝뚝한 말투로 인해 종종 교만하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는 그의 내면의 참모습을 고은 시인은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옛날에는 목제 성찬배와 같은 성직자가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목제 성직자가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거니와
이런 말 저쪽
 
그저께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신부 김승훈이야
늘 그대로 신부 김승훈
한결같다
변함없다
이런 말도 군더더기
늘어진 엿 다시 굳어지며
그대로 김승훈
목제 성찬배
 
< … >
 
그는 웃을 줄 모른다
웃어도 어쩐지 웃음이 아니다
두 눈 뜨면
아이들도 머쓱 달아나야 한다
 
그의 지루한 강론 어느 대목도 기름지지 않다
무지개가 떠
5색 7색이 되지 않는다
아니 어느 미사에서는
비가 오지 않는데
바람이 불지 않는데
촛불이 탁 꺼졌다
 
그러나 한번 이해하고 나면
그처럼 순정
그처럼 편협
아니 그처럼 넓은 이해가 어디 있는가
이것저것 촌수 잴 줄 모른다
 
무엇보다 그의 미사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그의 신앙으로 익은 미사는 깊다
몇 마디 서투른 농담 던져
그의 위엄 스스로 깨뜨릴 때
달아났던 아이들
하나둘 성당 지하실에 모여든다
(‘다시 김승훈’, 12권)
 
2003년 김승훈 신부의 장례식에서 추모시를 낭독한 고은 시인은 그를 “과묵, 눌변, 그러나 청동 같은 진정 / 거리에서, 미사 제단에서 / 아버지 같은 사람인데 / 돌아서면 어머니”인 사람으로, “가죽으로는 오만불손인데 / 속살은 온통 낮고 / 낮은 연민의 울림으로 내내 떨고 있었”던 사람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회고록(<당신께서 다 아십니다>)에서 자신이 젊은 시절 겪은 수모를 ‘건방지게 살지 못하도록 단련을 시키려’는 하느님의 뜻으로 해석했던 김승훈 신부는 2003년 9월2일 간암으로 선종한다. 장례미사와 민주사회장에 모인 많은 이들은, 항상 노동자들의 든든한 지지자였고 쫓기는 이들에겐 안식처를 제공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주머니를 털었던, 힘없고 억눌린 이웃들의 ‘우리 신부님’을 기억했다. 또한, 노동자, 학생, 단체의 활동가, 재야인사들이 들고 오는 이런저런 부탁들을 마다하지 않고 민주화운동의 반석이 되었던 한 정 많은 사제를 추모했다.
 
유신헌법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구속자 석방과 유신정권의 종식, 언론의 자유를 주장한 고(故) 김승훈 신부. 사진/뉴시스
 
‘길 위의 신부들’
 
김승훈 신부와 더불어 정의구현사제단의 중추 역할을 해 온 인물이 함세웅(1942~) 신부이다. 사제단의 창립부터 현재까지, 민주화운동을 비롯한 모든 사회운동의 중요한 순간들에 그가 있어왔다. 김승훈 신부도 함세웅 신부도 고난 받는 이들을 위해서는 투옥의 길도 마다하지 않았던 깨어 있는 사제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천주께서는
참 깨끗한 아들 하나를
거룩한 볼모로 삼으셨나이다
< … >
너희들
이 사람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거든
나를 함부로 망각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하얀 칼라 제복의 여고생들이
저쪽으로 가고 있다
저쪽에서 천주의 아들이 혼자 오고 있다
가고 오고
그 아들은 파란 하늘에 물들어 있다
 
맑은 얼굴
맑은 눈
비 온 뒤라면 무지개 걸려
 
그러나 독재나 어떤 잔재 따위에는
진흙탕 싸움을 사양할 수 없다
그 아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앞에서
지(知)와 신앙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도시의 신부다 두메로 가면 안 된다
(‘함세웅’, 10권)
 
마지막으로, 문정현(1940~) 신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75년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사형이 집행된 다음날인 4월 10일, 함세웅 신부와 문정현 신부 등 가톨릭 사제들은 위령미사를 올리려고 했으나, 경찰이 영구차를 크레인으로 탈취하면서 이를 저지하던 문정현 신부는 차에 다리를 깔려 이후 장애의 몸이 된다. 문정현 신부 역시 노동운동, 통일운동을 비롯해 사회운동 곳곳에서 버팀목이 되어왔다. 소파(SOFA) 개정운동, 평택 미군기지 반대, 용산참사 규명, 4대강 사업 반대와 수년에 걸쳐 진행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설치 반대투쟁 등 그가 가는 길은 늘 가시밭길이다. “한반도 허리 가시철망 넘어 / 만릿길 / < … > // 그 세 걸음 만리로 / 한번 절 만리로 / 겨레를 내 마음속 깊이 섬겨 / 누리 / 누리 목숨들 / 내 몸속에 새겨 / 모든 밖은 끝내 안 / 모든 땅은 / 끝내 하늘 // 오늘도 그가 오고 온다 어디서“(‘문정현’, 27권).
집안 내력도 만만치 않아, ”문씨 일가는 / 온통 천주교”여서 “그의 형제 정현 규현이 신부이고 / 그의 누이들이 / 다 수녀”이다. “일체의 위선이 거부된 신부 / 주먹 불끈 쥐면 / 싸움패가 되어버린 신부”를 노래한 또 하나의 시 ‘문정현’(12권)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지난 2013년 제주 서귀포시 제주해군기지(민군복합형 관광미항) 공사장 정문에서 문정현 신부가 공사차량의 이동을 막기 위해 정문을 막아서자 경찰이 문 신부를 이동 시키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정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교회 안에서
그는 천주한테도 별로 말이 없다
 
그의 성당은 늘 두메 성당
부모가 들에 나가면서
문밖 말뚝에
아이 묶어놓고 간 것을 본 뒤
그 어린아이 하나하나 맡아놓은 성당
 
도시의 찬란한 성당은 그의 집이 아니다
(‘문정현’, 12권)
 
이들 외에도 <만인보>에는, 문정현 신부의 동생으로 “임수경 양을 데리고” 오기 위해 “판문점을 넘어온 가슴 타는 용기”의 신부 ‘문규현’(12권), “무릎 꿇는 것은 / 마리아 앞에서이고 / 일어서는 것은 / 세상 가운데“인 신부 ‘오태순’(11권), ”사제이기 전에 / 순정”으로 “들판 한 군데 방금 갈아엎은 새 흙 같은 / 방금 갈아엎어 / 바람 쏘이는 새 흙 같은 침묵을 / 그의 천주로 삼”은 신부 ‘김택암’(13권), 그리고 “저 아래로 가라앉은 신앙이 / 떠오르는 저항으로 취하는 밤”을 맞이하는 신부 ‘양홍’(14권) 같은 사제단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이 있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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