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71화)결혼별곡
“초례상 위 / 닭 한쌍 놓여”
입력 : 2017-06-26 08:00:00 수정 : 2017-06-26 08:00:00
생로병사가 인류의 불가항력적 문제라면 관혼상제는 일생의 통과의례로 여겨져 왔다. 특히 사회제도로서의 ‘결혼’은 그 복잡한 면모와 변화과정만큼 주요한 성찰의 대상이었고 동서고금 문학의 한 주제였다. 예를 들어 러시아 작가 고골(1809~1852)의 희곡 <결혼>을 보면, 정부 관리인 중년의 귀족 남자가 중매쟁이를 고용해 신붓감을 찾아내지만 여자의 나이, 지참금, 신분 등을 생각하며 결혼을 주저한다. 그는 친구의 추진력 덕분에 다른 구혼자들을 물리치고 그녀와의 결혼에 이르게 되나 결국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결혼식 준비 도중 창문을 통해 도망가 버린다는 이야기로, 19세기 전반 러시아의 결혼 풍속도를 보여주고 있다.
 
결혼 성립의 필요·충분조건
이강백(1947~) 작가의 희곡 <결혼>(1974)은 작품이 발표되었던 70년대의 결혼에 대한 인식이나 환경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결혼과 돈이라는 시대를 가로지르는 보편적인 문제제기, 나아가 시간과 소유에 관한 철학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 젊고 잘 생겼으나 빈털터리인 ‘남자’가 결혼하기 위해 집과 하인 그리고 넥타이, 양복, 구두, 시계, 라이터 등의 물건을 일정한 시간 동안 빌린다. 그는 여성 잡지 ‘사교란’에 주소를 낸 ‘여자’와 맞선을 보면서 부자 행세를 하는데, 약속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빌렸던 물건들을 하나씩 하인에게 빼앗기게 된다. 남자는 여자의 미모에 끌리고 여자는 남자의 재력에 끌리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여자는 자신이 ‘덤’으로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그녀의 아버지가 빌린 재산으로 어머니를 속이고 자신이 태어나자 도망가 버린 사기꾼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남자는 물건을 빼앗기며 차츰차츰 본래의 빈털터리로 돌아간다. 여자와의 대화를 통해 인생의 모든 것이 잠시 빌렸다가 되돌려주는 ‘덤’이라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빈털터리인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된 여자가 떠나려 하자 소유의 본질과 진정한 사랑을 설파해 결국 여자와의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희곡 마지막의 낭만적 해피엔딩은 극이라서, 또 70년대가 배경이라서 가능했을지 모르겠으나, 모든 것이 이 세상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잠시 빌린 것에 불과하다는 철학적 반성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라는 주제에 ‘사랑’만큼이나 늘 따라다니는 ‘경제력’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회원국들 간의 사회지표들을 비교한 2016년도 보고서(<Society at a Glance 2016>)에 의하면, 한국은 저출산·고령화·노인빈곤·자살률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보이고 있다. 국민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지출은 낮고 고학력 비경제활동인구는 높으며, 국민 스스로 느끼는 건강도는 가장 나쁘다고 하니 삶의 만족도가 높을 리 없다. 또한,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인구 1000명당 혼인 건수를 나타내는 조(粗)혼인율이 1970년 통계 작성을 시작한 이래 2016년이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취업도 어렵고 돈이 없어 결혼을 꿈꾸지 못하는 많은 젊은이들, 게다가 한국사회에도 이제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는 인식이 확대되어가고 있고 다른 나라에는 이미 결혼을 대체하는 방식―프랑스의 ‘팍스(PACS, 시민연대조약)’는 동성 혹은 이성 간인 성인들의 계약으로 결혼과 흡사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도 등장해 있다. 이런 시점에 국민의 ‘결혼문제’에 간여할 수 있는 정부의 역할과 그 사회적 의미는 무엇일까?
 
취업이 어렵고 돈이 없어 결혼을 꿈꾸지 못하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결혼을 장려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모색되고 있다. 사진은 올해 전국 최초로 결혼장려팀을 신설한 대구시 달서구에서 지난해 열렸던 '청춘남녀 솔직담백 결혼 토크쇼'. 사진/뉴시스
 
정조의 혼인장려책이 낳은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
<정조실록>의 정조 15년 신해(1791) 2월9일(갑인) 기록에 의하면, 정조가 “곤궁한 백성들이 혼사와 장사에 시기를 넘기는 것을 크게 염려하여 한성부에 수소문해 아뢸 것을 여러 번 신칙”했다고 쓰여 있다(<정조실록> 권32). 몇 달 후인 같은 해 6월2일(을사)의 기록을 보면, 오부(五部)에서 혼사를 시켜야 할 남녀의 별단(別單)을 올렸는데 모두 281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유학(幼學) 신덕빈의 딸과 유학 김희집의 혼인 준비를 호조 판서 조정진과 선혜청 제조 이병모가 맡아 잔치를 열고 혼례를 이뤄 줄 것을 왕이 특별히 명했다는 것, 또한 내각(내규장각)에 소속된 관리들 중 글을 잘 짓는 사람이 전(傳)을 지어 그 일을 기록하도록 명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특이한 혼사가 <만인보>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 정조
< … >
그 시대
지지리 가난의 사내
김희집
장가갈 수 없음이여
지지리 가난의 계집
신씨녀
시집갈 수 없음이여
 
대궐까지 그 사연 어찌어찌 들어가
나라에서
혼자(婚資) 내려
저녁 어스름 속
백설의 말 타고
장가가는 신랑 김희집
덩실하여라
장가에 이르러
초례상 위
닭 한쌍 놓여
시집가는 신부 신씨녀
애틋애틋 족두리 구슬 설레어라
 
< … >
(‘흰말’, 27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정조대왕은 가난으로 인해 늦게까지 결혼하지 못한 백성들을 조사하고 그들에게 돈과 포목을 지원해 혼인을 시켰지만, 한성판윤 구익의 보고에 의하면 현감 김사중의 서손(庶孫) 김희집과 선비 신덕빈의 서녀(신씨녀)는 여전히 혼인을 못한 채로 남아 있었다. 심익상의 딸과 혼인할 예정이던 김희집은 그가 서얼임을 알게 된 신부 집에 의해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파혼을 당했고, 이원교의 아들과 혼인하기로 되어 있던 신씨 처녀는 집안이 워낙 어려워 처음의 지원금으로 식을 올릴 처지가 못 되자 나라에서 결혼 비용을 더 주기로 하였으나 신랑 측이 배신을 하고 다른 처녀와 혼인해 버린 것이다. 이에 고민하던 한성부 관리들은 서부령(西部令) 이승훈의 제안으로 김희집과 신씨 처녀를 혼인시키게 되는데, 보고를 들은 정조는 호조판서 조정진에게 김희집을 아들처럼, 선혜청 제조 이병모에게 신씨를 딸처럼 여겨 결혼 준비를 하고 결혼식을 치르라는 특명을 내리게 된다.
 
정조는 또한 이 사건을 내각검서(內閣檢書) 이덕무에게 전(傳)으로 남기게 했는데, 정조의 명을 받은 이덕무는 <김신부부전>―또는 왕이 준 결혼이라는 뜻에서 <김신부부사혼기(金申夫婦賜婚記)>―를 지어 내각 일력에 실었다고 한다. 이 흥미로운 결혼이야기 <김신부부전>은 <아정유고(雅亭遺稿)> 권12에 실려 있다. 다른 한편, 이 이야기는 <동상기(東床記)>라는 최초의 희곡작품으로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저자가 이름 밝히기를 꺼려해 작자 미상이다. 다만, 이 작품의 여러 이본들이 모두 <김신부부전>과 함께 묶여 있어, 혹자는 <동상기>의 저자를 <김신부부전>의 이덕무로 추측하기도 하고 혹자는 가장 나중의 이본에서 저자로 언급된 이옥이 <동상기>를 쓴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누가 썼든 간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저자는 더위와 지루한 장마에 지쳐 공부가 잘 안되던 어느 여름날, 종이 저잣거리에서 듣고 와 전해 준 이야기를 사흘 동안 전사·교정·등사해 썼고 덕분에 한가로움을 해소했다고 밝히고 있다.
 
혼인장려의 이유들
앞서 언급한 정조 15년 2월 9일(갑인) 기록에서 정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춘(仲春)은 곧 화기를 맞이하는 시기이다. 남녀 간에 나이가 찼는데도 혼사를 치르지 못한 자와 장사를 제때에 지내지 못한 자를 특별한 규례로 돌보아 주는 것은 진실로 옛 성군들의 인(仁)에 바탕을 둔 정사와 부합되는 것이다.” 즉, 그의 혼인장려의 이유는 “인(仁)에 바탕을 둔” 정치를 펼치기 위함이라는 것인데, 이는 정조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여러 왕들의 기록에 공통된 논지로 나타난다. 사실 혼인장려를 넘어서 거의 강요에 가까운 내용이 이미 조선시대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 예전(禮典) 혜휼(惠恤)에 등장하는데, “사족(士族)의 딸로서 나이가 30이 가깝도록 가난하여 시집을 가지 못한 자에게는 예조(禮曹)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자재(資材)를 헤아려서 준다”는 것과 “그 집안이 궁핍하지 않은데도 30세 이상이 되도록 시집가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그 가장(家長)을 엄중히 논죄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국가가 결혼문제에 개입할 때 주된 관심은 상민(常民)이 아니라 사족(士族)에 있었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에 있었다는 점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그러나, 혼인을 권장하기 위해 쌀과 돈 등 물품을 지급한 기록들은 있으나 혼인을 하지 않아 실제로 가장이 처벌된 사례는 찾아지지 않으며, 양반·여성 중심이던 혼인장려책도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신분·성별의 구분 없이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정지영, ‘조선시대 혼인장려책과 독신여성’, <한국여성학> 20(3), 2004.12, 9-10쪽).
 
또 하나 우리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위의 정조의 말에서도 나오듯이, ‘화기(和氣)’와 혼인의 관계이다. 나라에 가뭄과 같은 재앙이 드는 것은 화기가 상해서인데, 화기를 상하게 하는 원인들로는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거나 고된 노역을 시키는 것, 형벌을 공평치 않게 처리하는 것 등과 같이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생기는 경우이다. 여기에는 가난하여 장례나 혼인을 제때에 치르지 못하는 것도 포함된다. 특히, 남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처녀가 늦게까지 시집을 못 가면 그 처녀의 울부짖음이 화기를 상하게 해 가뭄과 같은 나라의 재앙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즉, 그토록 혼인을 장려한 이면에는 혼인을 못한 처녀들에 대한 가여움보다 그들을 방치하면 화기를 상하게 해 나라에 재난이 닥칠 수 있으므로 이를 방지하려는 이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교적 사회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화기, 음양의 조화가 깨져서는 안되었던 것이다(앞의 글, 11-15쪽). <김신부부전>에서 이덕무가 쓰기를, “백성들이 비를 바랄 때 한 어진 정사를 베풀면 기우제를 기다리지 않고 비가 곧 내리었다. 대저 김씨·신씨의 혼인 중매가 정하여지자 비가 즉시 패연하게 내렸으니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것이 이와 같이 빠르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이겠다.
 
앞서 소개한 <만인보>의 시에서 고은 시인은 정조가 맺어준 김신부부의 결혼기로부터 고대의 결혼들로 거슬러 올라가 그 찬연한 정경을 노래하고 그 이후 시작될 현실을 언급한다. 거기에는 혼인과 탄생설화들에 얽힌 흰말, 자색 단령의 이미지가 있고 ‘계림’이라는 이름을 유래시킨 닭의 울음소리가 있다. 문(文)·무(武)·용(勇)·인(仁)·신(信)의 다섯 가지 덕(鷄五德)을 갖추고, 매일 알을 낳으며 새벽마다 울어 다산과 성실의 상징인 닭 한 쌍이 초례상에 오르는 것도 이상할 바가 없다. 김신부부의 혼례에서 시작된 시 <흰말>은 혁거세와 알영부인의 설화와 혼례로, 충선왕의 혼인으로 넘나들며 성·속의 이미지와 혼례식의 화려한 색채들을 펼쳐 보임과 동시에 성차별적인 현실에 대해 상기시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 … >
 
과연 옛 은나라 시절 이래
과연 옛 단군 시절 이래
흰빛 섬겨
흰말 백설의 말 올라타
사뭇 거룩하여라
흰말에
자색(紫色) 단령
사각띠
두 날개 파르르
사모 쓴 신랑 사뭇사뭇 거룩하여라
 
과연 옛 계림 시절
흰말에
자색 알로
하늘의 아들 나와
땅의 닭 날개 밑
딸 나와
장차 자라나
열세살에 왕이 되고
왕후가 된 이래
그 이래
흰말 타고 자색 단령 걸치고
계룡 계림의 닭 홰쳐 오른
상 차려놓고
이쪽
저쪽
머리 숙여
그 모습 아리따워라
 
저 고려 후기 충선왕이
원나라 공주 데려올 때
납폐로 흰말 81필을 보냈느니
흰말로 하여금
새살림 열었음이여
 
그러나
무릇 이 거룩하올 아리따우실
저녁 어스름 혼례
거기까지일 따름
그 이튿날부터 신랑은 상전이고
신부는
부엌 살강 밑 묵은 계집 되고 마느니
세상의 골짝이란 골짝들 덩달아
앵돌아 서럽느니
(‘흰말’, 27권)
 
조선시대 후기에는 혼기가 찬 이들을 위한 혼인장려 외에도 다양한 혼례 풍습이 있었다. 18세기 제작된 ‘회혼례첩’은 결혼한 지 60년이 되는 해에 부부가 다시 혼례를 치르는 의식을 담은 그림이다.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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