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기자
(이정모의세상읽기)적벽과 고양시 그리고 일기예보
2017-12-22 06:00:00 2017-12-22 10:05:19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은 무엇일까? 혹자는 『성서』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도 평생 교회에 다녔고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줄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출판 관계자들에 따르면 대한민국 (굳이 남자들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끝까지 가장 많이 읽은 책은 『삼국지』라고 한다.
 
나도 다양한 판본의 삼국지를 여러 번 통독하고 그때마다 머릿속에는 새로운 이미지를 그렸다. 그런데 내가 머릿속에 그린 삼국지 이미지는 고우영 화백의 『만화 삼국지』의 변주에 불과했다. 역시 그림은 글보다 힘이 세다. 마찬가지로 영상은 그림보다 더 힘이 세다. 영화감독들에게 삼국지를 영화로 만들 장면 하나를 꼽으라면 대개 적벽대전(赤壁大戰)을 고를 것이다. 불타는 전장처럼 강렬한 장면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적벽대전의 이야기는 간단한다. 위나라의 조조는 80만 대군을 동원하여 양자강 남쪽의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오나라와 촉나라의 연합군은 불과 10만. 정면대결은 무모한 일이고 전쟁에 정도(正道) 따위는 없다. 정도대로 싸우면 그게 무슨 소설감이 되겠는가. 오나라의 대장군 주유는 조조에게 거짓 항복을 하고 위나라의 배들을 묶어 놓도록 한다. 묶인 배들을 불로 태우겠다는 심산. 이때 필요한 것은 남동풍이다. 하지만 때는 북서풍이 부는 계절. 제갈공명은 제단을 쌓고 머리를 풀어헤치고는 단식기도를 드린다. 거짓말처럼 남동풍이 불었고 주유는 화공계로 조조의 모든 배를 불태웠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다.
 
오우삼 감독의 영화 <적벽대전>은 내가 상상했던 모든 이미지를 불태우고 말았다. 심지어 고우영 『만화 삼국지』마저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오우삼 감독이 연출한 웅장한 스케일과 배우들의 강렬한 연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오우삼 감독의 독특한 과학적인 해석이 큰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책과 만화는 공명이 신통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만 표현한다. 여기서 과학자들은 좌절한다. 아니, 기도를 했더니 갑자기 홍콩 부근에서 강한 기압골이 형성되어 중국 대륙에 초고조로 발달한 시베리아 고기압을 북동쪽으로 밀어낸다는 게 말이나 되느냔 말이다. 오우삼 감독은 제갈량이 오랫동안 날씨를 관측하면서 바람의 방향, 습도, 구름 모양, 동물 움직임과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던 것으로 그린다. 기도의 힘이 아니라 기상예보의 힘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제갈량을 기상학자로 그려낸 점을 높이 살 수밖에 없다.
 
현대적인 일기예보를 이끌어 낸 사람은 찰스 다윈이 타고 전 세계를 누빈 비글호의 선장 로버트 피츠로이(1805~1865)다. 그는 해군 제독을 거쳐 뉴질랜드 총독을 지냈다. 피츠로이는 기압계를 각 항구에 설치하고 항해 중인 선장들이 주변의 기상을 수집하고 보고하게 함으로써 기상에 대한 과학적인 정보를 수집했다. 오우삼 감독의 해석대로라면 공명은 피츠로이보다 1600년 앞서서 과학적인 일기예보를 한 셈이다.
 
우리나라 역시 기상 데이터 축적에 있어서는 뒤지지 않는다. 이미 세종 시절에 세계 최초의 측우기를 만들어 강우량을 측정한 나라다. 그 이후에 확보한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크지만 말이다.
 
현대는 시간마다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에서 일어나는 온갖 기상 현황을 데이터로 축적하고 슈퍼컴퓨터로 분석함으로써 동 단위까지 정확한 일기예보를 하는 시대다. 사람들은 잘 믿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일기예보 적중률은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예보는 예보일 뿐이고 어쩌다 틀릴 수 있는데 그때의 기억이 시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히는 것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문제는 예보가 아니다. 예보가 나온 다음에 어떤 대책을 세우는가다. 지난 20일 오후에 경기도 고양과 파주에는 폭설이 내릴 것이라는 예보가 하루 전에 나왔다. 세상 사람이 다 알고 있었다. 정말로 폭설이 내렸다. 그러자 고양시는 교통지옥으로 변했다. 길에 차를 버리고 몇 시간을 걸어서 집으로 가는 사람이 속출했고 귀가를 포기하는 사람도 나왔다. 늦은 밤이 되자 교통문제가 해소된 것을 보면 대책이 없을 정도의 폭설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오나라와 촉나라 연합군은 일기예보만으로 적벽대전의 승리를 얻어낸 게 아니다. 예보에 맞춘 정확한 대책을 세우고 실행했기 때문이다. 지방정부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기상청은 천기를 누설해 주었지만 고양시는 제때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혹시 고양시장님은 삼국지 소설 판본처럼 기도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우삼의 영화도 보시길 바란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