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의세상읽기)편히 쉬세요, 스티븐 호킹 박사님.
입력 : 2018-03-23 06:00:00 수정 : 2018-03-23 06:00:00
1988년 어느 날 KBS 9시 저녁뉴스를 시청하던 중 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당시의 첫 번째 소식은 무조건 대통령 소식이었다. 9시 시보를 알리는 땡 소리 직후에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하는 첫 번째 뉴스를 전하는 소위 '땡전' 뉴스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통령 동정이 주요 뉴스로 다뤄지던 시대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뉴스 초반에 과학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도 책 발간 소식이다. <시간의 역사>가 바로 그것.
 
'시간의 역사'라니…. 아니 시간에 역사가 있다고? 그렇다면 시간도 시작하는 점이 있다는 말인가? 책 제목만 듣고도 의문이 쏟아졌다. 뉴스는 화려했다. 아마도 출판사 쪽에서 제공했을 그래픽을 배경으로 시간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날 나는 '빅뱅'과 '블랙홀'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지금이야 초등학생들도 아는 단어고 심지어 유명 아이돌 그룹의 이름으로 사용할 정도로 평범한 말이 되었지만 말이다.
 
이날 처음 들은 단어가 또 있다. 석좌교수가 바로 그것. <시간의 역사>의 작가가 케임브리지 대학의 루커스 석좌교수라는 것이다(우리나라에도 이미 석좌교수직이 있었지만 나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루커스 석좌교수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수학 관련 교수직 가운데 하나로 1663년에 만들어졌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1669~1701),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창시한 찰스 배비지(1828~1838), 양자역학을 탄생시킨 폴 디랙(1932~1968) 등이 이 자리를 차지했었다. 2395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스타트렉>에서도 인조인간 '데이터'가 루커스 석좌교수라는 것을 생각하면 석좌교수가 갖는 권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의 역사>의 저자는 이미 10년 전인 1979년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름은 스티븐 호킹. KBS 뉴스는 빅뱅과 블랙홀만큼이나 스티븐 호킹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루게릭 병을 앓고 있었던 것. 루게릭이란 병명 역시 이날 처음 들었다. 루게릭 병은 우리의 의지로 움직이는 근육인 수의근(맘대로근)을 제어하는 신경세포가 점차 사라지는 병이다. 근육이 딱딱해지고 약해지며 크기가 작아진다. 당연히 말하기도 힘들어지고 음식물을 삼키기도 어렵다. 화면에 나온 스티븐 호킹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으며 전신이 마비된 것처럼 보였다. 저런 사람이 빅뱅과 블랙홀이라는 어마어마한 책을 썼다고? 믿을 수 없었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나는 아직 거대한 크기의 XT 데스크톱 컴퓨터를 쓰고 있는데, 스티븐 호킹의 휠체어에는 작은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던 것이다. 그는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두 손가락만으로 휠체어에 부착된 음성합성기로 대화를 나누고 강연을 했다(말년에는 두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어서 뺨 근육의 움직임만으로 컴퓨터를 작동하여 연구를 계속했다). 뛰어난 학자를 위한 기술 지원시스템에 놀랐다.
 
호킹은 자신의 연구 목표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내 목표는 단순하다. 우주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왜 현재와 같은 모습을 띠고 있는지, 애당초 왜 존재하는지를 말이다." 그는 일반상대성이론의 여러 가지 정리를 증명했고 블랙홀이 열복사를 방출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그는 목표를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다. 이것은 다음 세대의 일이다. 스티븐 호킹의 가장 큰 업적은 따로 있다. "내 생애 가장 큰 업적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가 대중 강연에서 자주 했던 말이다.
 
3월14일은 일반인들에게는 화이트데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카를 마르크스 탄생일, 수학 선생님에게는 파이(π)데이, 물리학자들에게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생일로 기억되는 날이다. 2018년 3월14일 스티븐 호킹은 어느 블랙홀로 빨려 들어갔다. 혹시 아인슈타인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슬픈 일이지만 아픈 몸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그는 이제 자유다.
 
스티븐 호킹은 우리를 끊임없이 놀래키는 사람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2주 전 다중우주를 증명하기 위한 마지막 논문을 제출했다. 제목은 '영구적 팽창으로부터의 부드러운 탈출'. 우주 태초의 시간으로부터 남아 있는 자연 방사선을 측정하면 다중우주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론의 영역으로 머물던 다중우주론을 측정의 영역으로 옮기려는 시도다.
 
우리는 스티븐 호킹이란 인물을 잘 안다. 그를 통해서 빅뱅, 특이점, 블랙홀이라는 말도 익숙하게 되었다. 이제 단순히 단어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내용을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 그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말이다.
 
편히 쉬세요. 스티븐.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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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나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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