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과 남북경협)“서로 필요하다는 경제적 동기가 통일로 이어져”
(3) 남북대화 분위기 활용 실리적 남북경협론 주창
입력 : 2018-08-04 06:00:00 수정 : 2018-08-10 15:00:51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기업인으로서 공산권과의 경제협력사업(경협)을 적극적으로 구상한 배경에는 1970년대의 세계적인 탈냉전 분위기를 접하면서 남북대화와 교류의 길이 열릴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이미 1972년 12월 무역거래법 개정을 통해 대공산권 경제 교류를 허용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1978년 6월 남북 간 교역·기술·자본 협력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민간 경제인 협의 기구를 구성하자고 북한에 제의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도 1979년 말 미수교국(비적성 공산국가)으로서의 경제 진출 방안을 모색하면서 1980년 활동 방향으로 중국과 동구권 진출을 위한 정보활동사업 확충을 설정했다.
 
1989년 1월23일 9박 10일의 일정으로 한국 대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공개 방문한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자신의 생가를 찾아가 숙모, 조카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아산정주영닷컴
 
1980년대 들어 전두환 정부는 손장래 주미공사(안기부 차장보)을 통해 1981년 3월부터 1984년 말까지 남북정상회담을 모색했고, 김일성도 이에 동의했다. 일찍부터 공산권과의 실리경협을 구상한 아산은 1970년대 일선 사단장 재임 시절부터 알고 지내면서 신뢰 관계가 있던 손장래를 통해 정부의 남북대화 의지를 감지했다. 그 이후에도 장세동-박철언의 ‘88라인’을 통해 1985년 9월과 10월 허담의 서울 방문과 장세동의 방북 등 남북대화는 계속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국정연설에서 김일성을 초청하고 자신도 방북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아울러 전경련이 새로운 진출 대상으로 설정한 비적성 공산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방침도 밝혔다. 1982년 국정연설에서도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1월22일)과 그 실천조치로서 ▲호혜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상호관계의 유지 ▲분쟁문제의 평화적 해결 ▲현존 정치질서와 사회제도의 상호인정과 내정불간섭 ▲현존 휴전체제의 유지와 군비경쟁 지양 ▲모든 분야의 교류·협력을 통한 사회개방 촉진 ▲기존 국제의무 및 협정의 존중과 민족이익 증진 ▲서울과 평양에 상주 연락대표부 설치 등 7개 사항을 제안했다.
 
또한 손재식 국토통일원 장관은 사회개방 8개항, 교류협력 8개항, 긴장완화 4개항으로 구성된 20개 시범실천사업을 제의했다. 즉, ▲서울과 평양 간 도로연결 개통 ▲남북이산가족 간 우편교류 및 상봉 ▲자유관광 공동지역 설정 ▲판문점을 통한 해외동포의 고국 방문 ▲자유교역항(인천항과 진남포항) 개방 ▲남북 간 정규방송 자유 청취 ▲판문점을 통한 1986년(아시안게임)과 1988년(올림픽게임) 체육행사 참가 ▲판문점을 통한 외국인 자유왕래 ▲공동어로구역 설정 ▲남북 각계 인사의 상호친선방문 ▲기자의 남북 자유취재 보장 ▲민족사 공동연구 ▲체육교류 및 단일팀 구성 ▲일용생산품 교역 ▲자원 공동개발 및 이용 ▲기술자 교류 및 생산품 전시회 ▲비무장지대 경기장 설치 ▲비무장지대 학술조사 ▲비무장지대 군사시설 철거 ▲군사책임자 간 직통전화개설이다. 이중 12개 항목은 이때 처음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아산은 정부가 북한에 대화와 교류를 적극 제안하는 분위기를 활용해 1983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북한 접근 방식을 강조했다. 경제적 필요에 기초하여 실리적으로 북한과 경협을 추진하고자 주창한 것이다. 남북을 통털어 최초로 제기된 경협론일 것이다.
 
“나는 통일문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로서 파악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 통일이 될 수밖에 없는 (···) 아주 큰 요인은 (···) 특히 서로 필요하다는 경제적 동기가 가장 크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정치적인 동기, 한민족이라는 감상적인 동기가 모두 경제적 동기와 서로 교착하면서 통일이 되고, 그래서 새로운 생활의 장, 경제의 권을 마련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2000년대 조국번영(1983년 10월 인천대 학생관에서 아산이 한국청년회의소 회원들을 상대로 행한 강연))
 
이후 전두환 정부도 경협을 실현하려고 했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경제회담이 1984년 11월(제1차)부터 1985년 11월(제5차)까지 진행되었다. 1차 회담에서 정부는 시범 사업으로 물물교환(북한의 무연탄과 남한의 철강재)과 경의선을 연결하자고 북한에 제안했다. 그러나 남한이 제기하고 북한이 응하는 형태로 진행된 남북경제회담의 실제 성과는 없었다. 정치 군사 문제의 우선 해결을 중시한 북한은 제2차 경제회담(1985년 5월17일) 때부터 경협안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득실을 따지더라도” 남한이 유리하다면서 전 대통령의 경협에 적극적이었던 것과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당시 북한도 대외 교역을 적극 추진하면서 서유럽 자본 유치를 시도했다. 1970년대 중반 오일 쇼크 시기에 ‘채무불이행’ 선언으로 대외 신인도가 급락한 후에도 프랑스 등과 협력을 추구했다. 1984년 합영법 제정 후에는 재일교포를 비롯한 일본의 경제인들을 유치하고자 했다. 물론 공산권과의 돈독한 관계가 전제된 것이어서 1984~1985년에 김일성은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을 순방했다. 즉 이 무렵 북한은 적극적으로 대외경협을 확대하고자 했지만 남한을 그 상대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전두환 정부의 남북경협 추진 방침은 노태우 정부로 이어졌다. 노태우 정부는 북한을 포함한 공산권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1988년 ‘7·7 선언’에서 6개항 중 2개 항(③남북교역 개발 ④민족경제의 균형발전과 우방국의 대북교역 불반대)을 통해 남북교역을 제안했다. 1988년 광복절에는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다. 이어서 경제인 왕래와 북한 선박 입하 허용 등을 골자로 한 ‘10·7 대북교역문호개방조치’를 발표했다. 이를 두고 아산은 북한 상품에 대한 면세 조치는 “참 잘한 일”이라면서 남한의 “풍요로운 생활필수품을 북에 공급하자”고 역설했다.
(자료: 실리적 남북경협 - 아산의 탈이념적 구상과 실행, 정태헌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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