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의세상읽기)사건의 지평선과 호연지기
입력 : 2019-04-12 06:00:00 수정 : 2019-04-12 06:00:00
나는 바닷가에서 자랐지만 호연지기 따위는 기르지 못했다. 넓은 바다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려수도 끄트머리에 있던 우리 집에서는 수평선이 안 보였다. 섬들이 얼마나 많은지 섬과 섬이 중첩되어 바다는 섬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오히려 서울에서 자란 친구들이 수평선을 더 먼저 봤다. 그들은 가끔 동해로 피서라도 갔으니 말이다. 나는 대학에 들어간 후에야 처음으로 수평선을 봤다. 속초에서. 그때야 비로소 바다가 넓다는 것을 알았다. 호연지기를 키우기에는 너무 늦었다.
 
수평선을 처음 봤을 때 궁금했다.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주 멀리 가면 일본이 있겠지만 그것 말고 수평선 바로 너머에는 뭐가 있는지 말이다.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지평선을 본 적이 없다. 지평선을 처음 본 곳은 서호주 사막에서다. 사방을 둘러봐도 붉은 흙뿐이다. 화성에 도착한 우주선에서 내린 우주인이 된 것 같았다. '아, 지구는 둥글구나!' 첫 느낌이었다. 지도가 없다면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지평선 너머에 있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는 지평선 바깥에 있고 그들은 지평선 내부에 있는 셈이다. 지구 지평선 너머에 있는 이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할 수도 있고, 소식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우주에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부에서 알 수 없는 어떤 경계가 있다. 그것을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라고 한다. 사건의 지평선은 우리가 지구에서 보는 지평선과는 다르다. 양쪽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지구 지평선과 달리, 사건의 지평선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은 외부에 영향을 줄 수 없다. 블랙홀이 대표적인 사건의 지평선이다. 블랙홀 바깥에서는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물질도 들어가고 빛도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블랙홀 안쪽에서는 바깥쪽으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물질도 빛도 정보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원인은 한 가지. 중력 때문이다. 블랙홀의 중력이 너무 크다. 블랙홀의 중력에 대항하여 빠져나오려면 그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도 빨라야 한다. 그런데 우주에서는 그럴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빛보다는 빠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 블랙홀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블랙홀 바깥에서는 절대로 알 수가 없다. 한 번 들어가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그 경계면이 바로 '사건의 지평선'이다.
 
우리는 또 아인슈타인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올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관측으로 검증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블랙홀의 그림자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예측됐지만 직접 볼 수 없었다. 있는 것을 빤히 아는데 그걸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과학자들은 해내고 말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지구에서 5500만 광년 떨어진 M87 은하 중심에 있는 블랙홀의 그림자 사진을 찍겠다고 마음먹었다. 서울에서 달 표면에 있는 오렌지를 찾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떻게 할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 나라의 과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구만한 망원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자가 어떤 사람들인가? 연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협력하는 이들이 과학자다. 전 세계 200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모여서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EHT)' 프로젝트를 꾸렸다. 이들은 전 세계에 있는 8개의 전파망원경을 하나로 묶어서 지구만한 가상의 망원경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M87의 중심부를 관측했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지난 4월10일 수요일 저녁 10시에 전 세계 물리학자와 천문학자, 그리고 물리학과 천문학 애호가들은 각자의 장소에서 모니터 앞에 앉았다. EHT 프로젝트 연구진이 2년 전에 촬영한 블랙홀 사진을 공개하기로 예고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각국의 전파망원경에 잡힌 전파신호를 통합 분석해 블랙홀 사진을 만들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검은 부분을 둘러싸고 찬란한 빛이 휘어져 있다. 블랙홀은 안 보인다. 그 윤곽이 보일 뿐이다. 검은 부분은 블랙홀의 그림자다. 그 그림자 안에 블랙홀이 숨어 있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천문연구원 손봉원 박사는 "이제 블랙홀을 실제 관측해 연구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보이는 것만큼 알게 된다. 우리는 우주에 더 한층 다가서게 되었다. 사건의 지평선 코앞까지 갔다. 이제 지구인의 호연지기는 어디까지 성장할 것인가! 한국우주전파관측망과 동아시아우주전파관측망을 운영하는 한국천문연구원 과학자들의 눈에 달렸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penguin1004@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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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나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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