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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만취로 명확한 거부 없어도 나체 촬영은 위법"
"동의한 것으로 단정해서는 안 돼"…무죄 선고 원심 파기
2020-03-01 09:00:00 2020-03-01 09:00:00
[뉴스토마토 정해훈 기자] 여성이 만취해 명확한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은 것을 동의로 간주해 나체 사진을 찍은 행위는 성폭력처벌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대법원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성폭력처벌법 위반(카메라등이용촬영) 혐의로 기소된 이모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의정부지법에 돌려보냈다고 1일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진술에 의하더라도 피해자는 이 사건 당시 술에 만취해 판단 능력이나 대처 능력을 결여한 상태에 있었음이 분명하고, 피고인은 피해자가 이러한 상태에 있음을 알았으므로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가 피해자의 진정한 의사에 반한다는 사실을 적어도 미필적으로나마 인식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며 "이러한 상황에 처한 피해자가 피고인의 행위에 대해 거부 의사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고 해서 동의를 한 것으로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을 가질만한 사정을 찾기 어려운데도 원심은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 의심만으로 공소사실에 대해 범죄의 증명이 없다고 봤다"며 "원심의 판단은 이러한 증거 법칙에 위배해 자유심증주의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씨는 지난 2017년 4월 외상 술값을 갚겠다면서 유흥업소 운영자 A씨를 자신의 집에 데리고 간 후 휴대폰 카메라로 술에 취한 A씨의 나체 등 사진 2장을 촬영한 혐의로 기소됐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전경. 사진/뉴스토마토
 
1심은 "피해자가 이 사건 각 사진 촬영에 동의했다고 볼 수 없다"며 이씨의 혐의를 유죄로 판단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성폭력치료강의 수강 40시간을 명령했다.
 
이에 대해 "피해자는 그러한 촬영을 허락한 사실이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다"며 "촬영물 중 하나는 피해자가 잠든 상태에서 찍은 것이므로 그 촬영에 동의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또 "이러한 사진 촬영에 동의가 있었다고 하려면 그 동의는 명확한 것이어야 하는데, 촬영 당시 피해자는 잠들거나 잠들기 직전으로서 술에 상당히 취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러한 상태에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사진 촬영에 동의하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2심은 이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 몰래 각 사진을 촬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면서도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피고인이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각 사진을 촬영했다거나 촬영 당시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다는 사실을 피고인이 인식했다는 점이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입증됐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사건 후 5일이 지나 자신의 집으로 와서 술을 마시자는 피해자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각 사진을 피해자에게 전송했다"며 "피고인이 피해자 몰래 촬영한 것이라면 사진들을 전송해 보여줄 경우 피해자가 강력히 항의할 것은 물론 형사적인 책임까지 물으려 할 가능성이 충분히 예상되는데도 피고인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자연스럽게 각 사진의 존재를 말했고, 스스로 피해자에게 전송하기까지 했다"고 판단 이유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는 각 사진을 전송받은 후 피고인을 비난하는 투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으나, 피고인은 이에 대해 사과하거나 은폐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피해자가 동의했다는 취지의 답문을 보냈다"며 "이러한 피고인의 태도는 피고인에게 각 사진의 촬영 당시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촬영한다는 고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기에 수긍하기 어려운 면이 크다"고 부연했다.
 
이어 "피해자는 수사기관에서부터 원심 법정에 이르기까지 사건 당일 피고인의 집에 갔을 때 술에 만취한 상태여서 피고인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취지로 진술했다"며 "그렇다면 피고인이 사진을 촬영한다는 것에 피해자가 동의했는데도 이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전경. 사진/뉴스토마토
 
정해훈 기자 ewigjung@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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