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사우디 리야드의 킹 칼리드 국제공항에 도착해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의 영접을 받고 있다. (사진=뉴시스)
적지 않은 한국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아랍 관계에 대해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굳건하게 지원한다. 하마스와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아랍 세력 상당수가 테러리스트다. 테러에 맞서 싸우는 이스라엘은 한국의 우방이다.' 이런 스토리텔링에 익숙하죠.
고정관념은 머릿속 관념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국방 분야에선 이스라엘을 우리가 배울 게 많은 안보 선진국으로 꼽았습니다. 우리가 1968년 향토예비군을 창설할 때 이스라엘 예비군 제도를 참고했습니다. 한국군이 '한국형 아이언돔'을 개발한다는 말을 하는데, 이스라엘이 운용하는 미사일 방어 시스템 아이언돔을 본뜬다는 의미죠. 한국 국방부 공무원과 장교들은 이스라엘 군사기관을 자주 방문하고 이스라엘 전문가들과 교류했죠.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보수 성향 시민들은 태극기 집회를 열 때 성조기와 함께 이스라엘 국기를 흔들었습니다. 동맹인 미국 못지않게 이스라엘을 가까운 우방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겠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월13일부터 16일까지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아랍에미리트(UAE) 세 나라를 방문했습니다. 트럼프는 이번 중동 순방을 통해 한국 사람이 지녔던 고정관념을 말끔히 무너뜨렸습니다.
첫째로, 트럼프는 이스라엘이 간곡하게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순방 대상에서 배제했습니다. 과거 미국 대통령들은 물론이고 트럼프 대통령 본인이 1기 때 보였던 모습과도 전혀 달랐습니다. 대신에 트럼프는 순방 중 팔레스타인 대표를 만났습니다. 이스라엘이 여전히 테러 세력으로 간주하는 시리아 과도정부 대통령을 만났고 시리아에 대한 제재를 해제했죠.
둘째, 트럼프는 순방한 세 아랍 국가에서 무려 2조달러의 투자와 구매를 얻어냈습니다. 사우디에서는 무기 구매와 투자 패키지에 서명했으며 카타르에서는 보잉기 구매를 끌어냈습니다. 카타르에서는 미 대통령 전용기로 쓰기로 하고 4억달러짜리 보잉747 항공기를 선물 받았죠.
셋째, 이번 순방 일정에 드러내놓고 포함하진 않았지만, 트럼프는 이란과 핵 합의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핵무기 개발이 아니라 평화적 목적을 전제로, 이란이 핵 물질을 어떤 수준에서 농축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인가를 두고 두 나라 협상팀이 절충 중인데요. 이스라엘은 핵 협상 자체를 두고 펄펄 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절충이 아니라 "이란 핵 시설을 전면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요. 미국은 이스라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죠.
미국은 그동안 친이스라엘, 반이란을 중동 정책 기조로 삼았습니다. 이번에 트럼프는 그 기조를 180도 뒤집었습니다. 미국이 제 나름의 이념과 가치를 내세우며 중동 문제에 개입했던 과거와 달리, 트럼프는 미국의 실익 그것도 주로 돈으로 환산되는 이익 위주로 움직였습니다. 정책 변화를 표로 요약했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이스라엘 정부는 강력히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트럼프의 중동 순방을 전후해 '기드온의 전차 작전'을 발표하고 가자 지역을 맹렬하게 공격했습니다. 공습으로 하루에 주민 150여명이 숨지기도 했죠. 2023년 10월7일 가자 전쟁이 일어난 이래 숨진 가자 주민이 5만3000명이 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란 핵 시설을 폭격하려 한다는 보도를 미국 언론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으로, 미국과 이란이 핵 합의를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경우 이스라엘이 이란을 선제공격해서 협상 판 자체를 깨버리는 수순을 네타냐후 정부가 고려하고 있음을, 미국 언론 보도를 보면 짐작할 수 있죠. 트럼프한테 곤혹스러운 상황인데요. 그만큼 미-이스라엘 관계가 벌어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안보 차원에서 어떤 시사점을 얻어야 할까요? 첫째, 트럼프의 미국이 자국 실익을 어떻게 챙겨 나가는가를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트럼프는 세계 여러 나라를 상대로 관세전쟁을 선언했죠. 이번 중동 순방을 통해서는 지역 단위로 실익을 챙기는 방식을 처음으로 선보였습니다. 이념과 가치보다는 경제적 실익을 앞세웠죠. 돈이 많이 드는 전쟁을 회피하는 경향도 보였습니다. 한반도와 동아시아 문제를 우리가 미국과 협의할 때, 이런 흐름을 잘 파악하고 조화롭게 절충점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20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폭격 이후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이스라엘 남부에서 관측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둘째, 이스라엘이 비인도적인 가자 전쟁 수행 방식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자 전쟁 발발 이래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 시리아 무장세력, 이란 시설 등을 공격해 많은 군사적 성과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유엔 총회를 열었다 하면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죠. 요즘 영국과 프랑스, 캐나다는 이스라엘에 대한 제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군 부사령관 출신 정치인 야이르 골란은 5월19일 이스라엘 공영 라디오에 출연해 “제정신을 가진 나라는 민간인을 상대로 전쟁하지 않고, 취미로 아기들을 죽이지 않고, 주민들을 축출하는 목적을 설정하지도 않는다”고 네타냐후 정부의 전쟁 방식을 비판했습니다.
독일 군사사상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말했는데요.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기고 정치에서 패배하는 꼴이 됐습니다.
셋째, 세계가 신냉전 구도를 넘어 각국이 국익 중심으로 각축하는 다극화로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념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말아야죠. 조만간 출범할 새 정부가 세계의 변화를 잘 읽고, 국익 중심 실용 외교와 실용 안보를 펼쳐 나가길 기대합니다.

■필자 소개/박창식/언론인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광운대에서 언론학 석사와 박사를 했다. 한겨레신문 정치부장 논설위원을 지내고 국방부 국방홍보원장으로 일했다. 뉴스토마토 객원논설위원과 뉴스토마토 K국방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국방 생태계에서 소통을 증진하는 방법에 관심을 두고 있다. <국방 커뮤니케이션> <언론의 언어 왜곡>과 같은 책을 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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