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태현 기자] 검찰이 건진법사 전성배씨의 자택에서 발견한 '관봉권 띠지'를 분실한 건 '직원의 실수'가 아닌 '의도적 인멸'이라는 의심이 짙어집니다. 검찰은 압수물에 대한 엄격한 수리·처분을 위해 '검찰 압수물 사무 규칙'까지 만들어놨고 여기엔 주의 의무까지 명시됐습니다. 그럼에도 수사를 지휘하는 검찰이 뇌물·정치자금 수사의 기초 자료 분실, 4개월이나 쉬쉬한 건 사건을 은폐·축소하려는 정황이라는 겁니다.
검찰이 지난해 무속인 '건진법사' 전성배씨 자택에서 압수한 5천만원 신권 '뭉칫돈'의 출처를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진은 전씨의 자택에서 나온 한국은행이 적힌 비닐로 포장된 돈뭉치. (사진=연합뉴스)
남부지검, 지난해 12월 건진법사 '관봉권 분실'
서울남부지검은 앞서 지난해 12월17일 전성배씨의 서울 양재동 자택을 압수수색 하는 과정에서 현금 1억6500만원을 압수했습니다. 이 중에는 관봉권 5000만원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5만원 관봉권은 100장 단위로 묶여 띠지로 둘러져 있었고, 100만 단위 10개 묶음으로 비닐 포장한 뒤 스티커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검찰은 5만원권 관봉권 100장을 묶은 띠지 등을 폐기했습니다. 관봉권 5000만원과 같이 압수된 1억1500만원의 띠지도 모두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대해 19일 남부지검은 "경력이 짧은 직원이 현금만 보관하면 되는 줄 알고 실수로 버렸다"고 해명했습니다. 현금 등의 압수물이 들어오면 바로 압수물 담당자가 현금을 세는데, 이때는 관봉권 띠지가 당장 중요한 게 아니니까 따로 챙기지 않았을 것이고, 이러는 과정에서 띠지가 분실됐다는 취지로 해명한 겁니다.
그러나 남부지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같은 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관봉권 띠지 분실 사건'에 대해 진상 파악과 책임 소재 규명을 위한 감찰 등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정 장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서도 "금융사건 수사 전문 검찰청인 남부지검이 중요 증거를 이렇게 허무하게 ‘분실’하는 것도 모자라, 사기 저하를 우려해 감찰조차 하지 않았다는 해명은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노만석 검찰총장 직무대행(차장검사)도 곧바로 대검 감찰부가 직접 감찰에 착수해 진상을 파악하고 책임 소재를 규명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검 감찰부는 감찰3과장을 팀장으로 하는 조사팀을 구성, 남부지검 감찰에 착수했습니다.
검찰 '직원 실수'…법조계 "의도적 폐기"로 의심
그러나 법조계에선 수사 실무를 해봤다면 남부지검의 해명은 납득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읍니다.
관봉권은 한국은행에서 새 지폐를 비닐에 밀봉한 채 시중은행에 지급하는 돈다발입니다. 관봉권은 개인에게 인출되지 않고, 국가 예산을 쓰는 정부기관 등에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또 관봉권 띠지와 스티커에는 처리 부서, 기계 식별번호, 담당자 코드, 검수 일시 등의 정보가 기재되고, 시중은행 띠지에는 취급 지점과 검수관 도장이 찍힙니다. 모두 뇌물, 정치자금의 출처와 흐름을 추적할 수 있는 핵심 증거들입니다.
때문에 이런 중요한 증거로 활용될 압수물이 훼손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는 것은 경력의 짧고 길고를 떠나 검찰 수사관이라면 상식이라는 겁니다. 특히 남부지검은 금융범죄 수사 중점 검찰청으로 지정된 곳이며, 전씨 사건은 남부지검에서도 핵심 부서인 가상자산범죄합동수사부에서 다뤘습니다. 이 때문에 뇌물, 정치자금 수사의 '전문가'들이 이런 초보적 실수를 했다는 데서 이번 일은 '의도적 폐기' 의심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검찰 고위 간부 출신의 한 법조인은 "압수물을 압수해 오면 검사실에 보관하다 압수물 보관 담당자가 따로 관리를 하는데, 보관 담당자는 책임 소재가 있기 때문에 분실할 가능성이 낮다"며 "(남부지검의 해명은) 마약을 압수해놓고 '밀가루인 줄 알고 버린 것 같다. 그런데 잃어버린 경로는 모른다'라고 얘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전씨 자택에서 발견된 현금 뭉치는 김건희특검이 수사하는 국민의힘과 통일교 청탁·유착 의혹에 관련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남부지검은 돈의 출처도 확인되지 않았는데, 돈뭉치가 통일교 유착 의혹과는 관련이 없다고 판단하고 이를 수사하는 특검에 넘기지도 않았습니다. 증거가 사라진 걸 파악한 것도 압수한 지 4개월이 지나서였습니다. 이 때문에 검찰의 설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지난해 12월 압수수색 이후 4개월 동안 검찰은 이 부분에 대한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탓에 수사 지휘부와 대검찰청 지휘부가 쉬쉬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됩니다.
검찰은 압수물에 대한 엄격한 수리·처분을 위해 검찰 압수물 사무 규칙까지 만들었습니다. 검찰 압수물 사무 규칙 제18조엔 "영치사무담당직원은 특수압수물에 관해 압수물대장 외에 별지 제8호 서식에 의한 특수압수물대장에 피의자 성명·압제번호·품명·수량 기타 필요한 사항을 구체적으로 기재해 이를 작성·비치하고, 그 보관상황을 명백히 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검찰은 혹시라도 압수물 관리가 소홀해 수사에 지장을 줄 것을 우려, 제3조에 주의 의무까지 명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압수물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는 직원은 압수물이 범죄 수사와 공소 유지에 중요한 증명 자료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압수물이 멸실·훼손·변질되지 않게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또 압수물 사무 담당 직원은 압수물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취급하고, 관계 서류를 항상 정비해 압수물에 관한 사무에 대한 타인의 의혹을 사는 일이 없도록 엄정한 태도로 관련 업무를 처리해야 합니다.
이에 수사관 출신의 한 법조인은 "원형 보존 상태라면 띠지를 버릴 수 없다"며 "원형 그대로의 띠지 등 증거를 찍어놓고 기록에 편철한다"며 "국고에 보관하더라도 그건 전부다 사진으로 찍어놔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태현 기자 taehyun1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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