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안정훈 기자]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연이어 자체 AI 칩 제작에 나서면서 ‘탈엔비디아’ 흐름을 가속화하는 가운데, 국내 반도체 기업 사이에서도 기대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미국의 마이크론까지 고대역폭메모리(HBM) 제조3사가 엔비디아라는 ‘절대적 갑’의 공급망 진입에 매달리던 것과 달리, 선택의 폭이 넓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상황에 따라 필요한 주문형 반도체(ASIC)의 디자인이 각각 다르지만, 결국 HBM이 탑재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최근 가격 협상에서 주도권이 엔비디아로 넘어가는 추세였던 만큼, 잠재적 고객이 늘어나는 현상은 HBM 제조사들로서도 호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브로드컴. (사진=연합뉴스)
최근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자체 AI 칩 제작에 속속 나서고 있습니다. 앞서 호크 탄 브로드컴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4일(현지시간) 3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 “네 번째 고객사로부터 100억달러(한화 약 14조원) 규모의 AI 가속기 주문을 확보했다”고 밝혔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느 고객인지 밝히지 않았으나, 파이낸셜타임스(FT)는 5일 해당 회사가 오픈AI라고 보도했습니다.
주목되는 점은 오픈AI가 브로드컴의 ‘네 번째 고객’이라는 점입니다. 비슷한 규모의 고객을 최소한 셋은 확보했다는 의미로, 탈엔비디아 기류가 가시화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탄 CEO가 이날 밝힌 고객들이 어느 기업인지 밝혀지진 않았으나, 현재 브로드컴의 주요 빅테크 고객은 구글·메타·바이트댄스 등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구글은 올해 7세대 TPU ‘아이언우드’를 공개할 예정이며, 메타는 지난해 ‘MTIA’를 출시한 바 있습니다.
ASIC 수요 확산은 국내 반도체업계에도 호재가 될 전망입니다. ‘주문형 반도체’인 ASIC는 기업의 상황과 용도에 따라 디자인이 달라지지만, HBM은 공통적으로 들어가는데, 즉 구글과 아마존웹서비스(AWS), 메타 등 빅테크 기업이 HBM 제조사들의 잠재적 고객사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AI 칩 시장 공급망 다변화는 ‘엔비디아 일극 체제’가 완화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그동안 HBM 제조사들은 모두 엔비디아 공급망에 진입하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대기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엔비디아 공급망에서 가장 높은 지분을 차지했던 SK하이닉스는 전례 없는 호조를 누린 반면,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분야의 부진과 미중관계 등 외부적 요인이 겹쳐 실적이 크게 악화했습니다.
지난해 10월 관람객들이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26회 반도체대전(SEDEX 2024)에서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엔비디아 일극 체제’에 따른 가격 경쟁력 악화 역시 완화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올해까지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가 절대 강자였던 것과 달리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이 부상하면서 3사 간 경쟁도 치열해졌고, 최근에는 가격 경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된 바 있습니다. 골드만삭스 역시 지난 7월 “HBM 경쟁 심화로 가격 결정권이 고객사(엔비디아)로 이동하고, 내년에는 처음으로 HBM 가격이 하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미 국내 기업들은 HBM 수요 확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평택 D램 공장에서 10나노급 6세대(1c) D램 생산을 준비하고 있으며, SK하이닉스는 청주 M15X 팹에서 10나노급 5세대(1b) D램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내년도 HBM4가 메인 무대에 서게 됐을 때를 대비하는 양상입니다.
업계도 잠재적인 고객의 증가세를 기대하는 분위기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물론 빅테크 기업들이 국내 반도체 기업을 파트너로 고르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아직 가정의 영역”이라면서도 “잠재 고객사가 늘어난다는 건 호재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안정훈 기자 ajh76063111@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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