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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22화)"그대 가는가 어딜 가는가"
6월 민주항쟁의 기억
2016-06-13 06:00:00 2016-06-13 06:00:00
지난 9일 연세대 정문 왼쪽 기둥 앞쪽 바닥에 하나의 동판이 설치됐다. 장미꽃 한 송이와 함께 새겨진 동판의 글귀는 이러하다. "1987년 6월9일 오후 5시 당시 연세대 2학년이었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곳, 유월민주항쟁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동판이 설치된 지점은 29년 전 그가 최루탄에 쓰러졌던 바로 그 자리. 장미꽃은 그가 병상에 있을 때 동아리 친구가 그에게 그려준 ‘생명의 꽃’이다(‘이한열기념사업회’ 자료). 늘 6월의 기억 속에 있던 그가 이제는 자신이 쓰러진 곳을 지나는 행인들 속에서 매일 '생명의 꽃'을 피우게 됐다.
 
항쟁의 불씨를 지피다 - 박종철(1964-1987) 
 
1987년 1월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취조를 받던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자신의 하숙집에서 연행된 그는 동아리(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서울대 비공개 학생운동조직 ‘민주화추진위원회’의 지도위원으로 수배 중이던 박종운의 소재를 묻는 경찰에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비통하게 세상을 떠났다. 은폐될 위기에 있던 이 사건은 1월15일 검찰 간부의 말에서 단서를 잡은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가 탐문취재 끝에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기자가 쇼크사에 따옴표를 친 것이 의미심장하다―라는 제목의 2단 기사를 내보냄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당시 치안본부장이던 강민창은 1월16일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희대미문의 사인을 발표해 국민들의 공분과 조롱을 샀다.
 
사건 발생 후 대공분실 509호에 불려가 박종철 군을 제일 먼저 검안했던 의사 오연상(중앙대부속 용산병원)은 1월15일 그의 사망진단서를 보고 감시를 피해 병원 화장실로 찾아온 중앙일보 기자에게 사실을 확인해 준다. 16일엔 자신을 찾아온 수십 명의 기자들에게 용기 있게 물고문을 암시하는 증언을 함으로써, 17일 동아일보에 그의 증언이 실리는 것을 비롯해 이후 언론의 대서특필이 시작된다. 그리고 네 달 후인 5월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5·18 광주민중항쟁 7주기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사건의 고문경찰관이 5명에서 2명으로 은폐·축소되었음을 폭로함으로써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다. 
 
"1987년은 꽃의 계절이었다 / 그 꽃으로 하여금 싸움의 계절이었다 / 저 6월 대투쟁의 꽃 / 모순의 근원에서 / 캄캄하게 죽어간 꽃 / 이 땅과 / 온 세상 전역에 찬연히 들불로 번진 꽃 / 네 이름 박종철 // 죽어 시체 빼앗겨 화장되어 / 그 뼛가루 / 분단의 임진강 한줄기에 뿌려져 흘러갔으나 /네 이름 박종철 / 이 땅 안팎 가득히 피어난 시대의 꽃 // 마침내 이 땅은 너를 가졌어라 / 네 죽음으로 비통한 바 진노한 바 넘쳐 / 이 땅은 네 영광을 가졌어라 / 그렇다 진리는 죽은 자로부터 태어난다 / … // 종철아 잘 가거래이 / 이 애비는 할말 없대이"('박종철', 별편). 
 
항쟁의 교두보 - 이한열(1966-1987)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열망을 무시하고 또다시 '체육관 선거'를 하기 위해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이에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일인 6월10일에 맞추어 국민대회가 계획됐다. 6월9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6·10 국민대회'를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졌다. 6월10일부터 29일 노태우의 '6·29 선언'이 나오기까지 전국이 투쟁이었고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시내 중심가로 등·하교를 하게 됐다. '박종철'이라는 제목의 추모시를 쓰기도 했던 또 한 명의 청년 이한열은 매일 밤 경찰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병실을 지키던 학우들을 7월5일에 끝내 떠나고 만다. 
 
"나는 가장 긴 조시를 네 관 앞에 바쳤다 / 이한열 / 네 장례식은 / 이 땅에서 가장 큰 장례식이었다 / 1백50만 이상 / 너를 보냈다 / 너를 네 고향 빛고을 망월동으로 보냈다 // 그대 가는가 / 어딜 가는가 / 그대의 등 뒤에 내려깔린 쇠사슬을 / 마저 손에 들고 / 어딜 가는가 // 네가 남긴 시 한 토막 부르며 / 너를 보냈다 / 아름다운 젊음 / 너를 그렇게 보내고 말았다"('이한열', 별편). 이한열이 쓴 원시에는 "그대 왜 가는가"로 돼 있는데, 이제 그 자신이 그 구절을 듣는 사람이 되어 떠나버렸다. 
 
지난 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열린 제29주기 이한열 동판 제막식을 찾은 시민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만인보>는 광주민중항쟁이 있었던 1980년까지를 다루고 있지만, 고은 시인은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산화한 꽃다운 젊은이들에 대한 추모시들을 15권 뒤에 따로 별편으로 묶어뒀다. 아까운 젊음들을 숱하게 떠나보내며 조시를 읽어야 했던 시인으로서는 필연적인 추가였으리라. 그해 명동성당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할 때 그들을 지원해 준 든든한 원군은 성당 내에 천막을 치고 살던 상계동 철거민들이었다. 시위과정에서의 물리력 사용으로 인해―그곳이 성당이었으므로―학생들과 신부님들 사이에서 마찰이 있었을 때 상계동 주민들이 한 말을 필자는 아직도 기억한다. "학생들, 그러지 말아. 신부님들은 우리를 여기서 살게 해 주신 고마운 분들이여. 싸움은 우리가 할게." 그러고 나서 경찰을 향해 달려가던 그들의 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다.
 
다르게 또 같게 반복되는 듯한 역사의 지평에서, 박종철의 죽음과 함께 이한열의 죽음은 닮은꼴 김주열의 죽음처럼 항쟁의 기폭제로 시민들을 결집시켰다. 하이힐을 신은 여학생들이 모여 김밥을 싸서 나르고, 넥타이부대 회사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며, 시장의 상인들이 시위대에게 빵과 물을 주고 호스로 물을 뿌려 최루탄 가루를 씻어냈다. 80년 광주의 모습이 이와 유사했으리라. 또 그렇게, 이한열의 장례식에 시민 상두꾼들이 모여들었다.
 
"1백50만의 상두꾼 장례식 / 너 한 사람 / 얼마나 드높은 목숨이던가 / 그 목숨 끊어져 / 우리는 너를 보내고 말았다 // 네 죽음이야말로 / 군사파쇼와 맞서 싸운 자의 전사였다 / 이 땅의 모든 늙은이들이 / 네 장사 지내는 이 땅이야말로 / 이제까지 망해온 나라였다 // 이로부터 네 영령 앞세워 나아가리라 / 가장 아름다운 이념으로 / 네 젊음으로 / 저 악의 정치에 나아가리라 / 북 치고 / 네 감은 눈 / 모든 눈으로 떠 빛나며 / 불처럼 / 물처럼 나아가리라 // 내 강아지야 한열아 하고 부르짖은 / 네 어머니와 함께 / 네 학우와 함께 / 오 무등과 함께 나아가리라"('이한열', 별편). 
 
외면 받은 7·8월 노동자 대투쟁 - 이석규(1966-1987)
 
이한열 열사와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이석규 열사를 생각한다. 그해 여름은 6월 항쟁의 결과로 직선제 개헌이 관철되고 민주화가 진일보하는 듯 보였으나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생존권 보장 요구는 성과가 없는 상태였다. 학생과 중산층 소시민이 중심이 된 6월의 투쟁이 수그러들자 7월-8월에는 노동자들이 생존권과 권익투쟁에 나서게 된다. '민주노조 건설',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중, 옥포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시위 과정에서 8월 22일 이석규가 이한열처럼 직격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다. 박종철, 이한열이 전 국민의 애도를 받았던 것과는 달리 그의 죽음이 그만큼 주목받지 못했던 것처럼, 7·8월 노동자 투쟁은 6월 투쟁과는 달리 정치권과 국민들의 상대적 무관심 속에서 외롭게 진행됐다. 그 이유를 성찰하며 다음의 시를 읽고자 한다.
 
지난 2013년 대우조선노동조합이 회사 내에 세운 노동자 추모위령비. 위령비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숨진 고(故) 이석규, 이상모, 박진석, 박삼훈, 최대림 등 5명의 흉상과 노동의 고귀함을 상징하는 조각상으로 세워졌다. 사진/뉴시스·대우조선노동조합
 
"1987년의 절반은 학생의 것 / 그 절반은 노동자의 것 / 6월 대투쟁 / 이한열이 최루탄 맞고 죽었고 / 7월 8월 노동투쟁 / 대우조선 이석규가 최루탄 맞아 죽었다 //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 옥포 대우조선에서 일하던 / 스물두살의 청년 이석규 / 그가 최루탄 파편 맞아 죽었다 / 그의 오른쪽 가슴팍에 맞아 죽었다 // 물론 그의 주검 빼앗겼다 / … // 비록 그의 무덤조차도 강제의 무덤이지만 / 그의 죽음 / 노동자의 생존권 요구 투쟁을 / 정치와 역사의 앞장으로 끌어올렸다 // 누군가 / 그의 죽음에 대고 외치기를 / 천만 노동자의 가슴에 너를 묻는다 했다 // … / 너의 무덤은 흙더미가 아니라 / 산 자의 가슴속이다 / 한맺힌 천만 노동자의 가슴팍이다"('이석규', 별편).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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