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86화)술잔에 비친 시대상
“나 술 마시다 죽으면 / 죽은 곳 / 거기 바로 묻어다오”
입력 : 2017-11-06 08:00:00 수정 : 2017-11-06 08:51:33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개벽>, 1921년)에서 현실에 절망한 남편은 “이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라고 말하고 ‘사회’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아내는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라고 한탄한다. 사회적 상황이 ‘스스로’ 술을 마시게도 하지만, 현대 한국사회의 고질적 병폐 중의 하나는 ‘술을 강요하는 문화’였다. 알코올 분해효소가 없는 대학생이 선배의 강권으로 술을 마시고 사망에 이르던 신입생 환영회 분위기나, 직장인들이 퇴근 후 강요받던 술자리 회식문화가 근래 들어 개선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술이 인류와 더불어 이토록 오래 지속된 이유는 무엇일까.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한 ‘2016우리술 대축제’에 진열된 전통주 모습. 사진/뉴시스
 
사라진 전통주와 가양주
땅에 떨어진 과일이 자연 발효되어 만들어진 술을 인간이 우연히 발견하고 이후 인간 스스로 과실주를 제조하게 된 시기는 기원전 6000년경에서 9000년경으로, 곡물로 술을 만들게 된 시기는 기원전 4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데, 모두 추정일 뿐이라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인류의 동반자 역할을 해온 그 오랜 세월만큼이나 전해오는 이야기들도 많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술과 관련해 서양에서는 신화 속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바쿠스)와 그를 따르는 무리의 광란의 제전을 떠올리거나, 구약성서 속 인물인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창세기 9장20~21절)라는 구절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동양에서는 중국의 고서 <전국책(戰國策)>이 전하는 이야기 즉, 옛날 황제(黃帝)의 딸 의적이 술을 빚어 하(夏)나라 우왕(禹王)에게 올렸더니 이를 맛본 우왕이 후세에 반드시 이 술로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라 말하며 술을 끊고 의적을 멀리했다는 이야기를 만나거나, 보다 가까운 우리 신화로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하백의 딸 유화와 인연을 맺을 때 술을 사용했고 후일 동명성왕이 된 주몽을 낳았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술이라 하면 흔히 막걸리와 원나라 시절 몽골에서 유래된 소주 그리고 몇몇 다른 술들을 떠올리지만, 사실 우리는 훨씬 더 다양하고 많은 종류의 전통주와 가양주(家釀酒)를 가지고 있었다. 문헌상 조선시대에 수백 종이 있었다는 전통·가양주의 맥이 끊긴 원인으로는 보통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주세령’이 언급된다. 1916년의 주세령은 1909년 공포된 통감부의 주세법을 개정한 것으로, 조선총독부의 주요한 조세수입원이 될 주세를 거두기 위해 일제가 술 제조에 대한 통제정책을 펼친 것이다. 1916년 당시 12만개 이상이 있었다는 전국의 양조장은 일제의 정책에 따라 4천여 개로 통폐합되었다. 또한, 1920년에 들여온 일본식 누룩 입국(粒麴)이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조선 누룩을 대체함으로써, 인공적으로 배양된 단일균이 빠른 발효로 인해 양조의 효율성을 높였으나 조선 누룩의 야생균이 자아내던 깊은 맛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1930년대에 이르면 조선총독부 조세수입의 30%를 주세가 차지했다고 하니 그 중요도를 짐작할만하다.
 
반야탕(般若湯)과 미혼탕(迷魂湯) 사이
불가에서 술을 지칭하는 두 표현인 ‘반야탕’과 ‘미혼탕’은 극과 극의 뜻을 가진다. ‘반야’가 ‘지혜’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 또는 팔리어 ‘빤냐’의 음역이니, 술은 반야탕 즉 ‘지혜의 물’이 될 수도 있고, 미혼탕 즉 ‘혼을 미혹하는 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술이 ‘곡차(穀茶)’가 되느냐, ‘지수(智水)’가 되느냐, 재앙의 근원인 ‘화천(禍泉)’이 되느냐는 마시는 사람과 상황에 달려있으리라.
 
저 옛적 진(晋)나라 묵객
유영(劉伶)이렷다
늘 술 한병 차고 다니며
마시고
또 마셨다
 
종 하나 삽 들고 따라다녔다
 
나 술 마시다 죽으면
죽은 곳
거기 바로 묻어다오
분부하며 당부하며 마셨다
 
가고 갔다 마시고 마시고 마셨다
어쩌다가
시 한수 왔다
 
이에 질세라
바다 건너
동토 황토 위 한 사람 계셨더라
종은 아닐지나
오다가다 만난 아이 딸려
오늘도
삼거리 객줏집
한잔 한잔 또 한잔
거기서 취중절명하니
 
따르던 아이가
삼거리 세 길목 둘러보며
어느 길목에 묻어드릴깝쇼
호남길이우
영남길이우
동쪽 영동길이우
하고 송장더러 물었다
송장 눈떠 영동 쪽이다 하고 눈 감았다
그 길목에 묻으니 밤에 비 왔다
 
자칭 김삿갓 4대손
방랑 묵객이라
방랑 가객이라던
김장구(金長久)
 
< … >
이마빼기
툭 불거져나온 짱구를
점잖은 발음으로 장구라 하여
그것이 본명이 되고
본명 안식은
진작 어디에 묻어놨다 하더라
(‘유영 후예’, 28권)
 
늘 술병을 차고 다니며 뒤따르는 종에게 삽을 들려 자신이 죽으면 그곳에 그대로 묻으라 했다는 유영은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명이다. 죽림칠현이란 중국의 위·진 왕조 교체기 당시 정치 상황에 관여하지 않고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노장(老莊)사상에 심취해 있던 지식인 7인을 가리킨다.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 791~817)의 <장진주(將進酒)> 마지막 구절에는 유영이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술은 유령(유영)의 무덤 위 흙에는 이르지 않나니“(酒不到劉伶墳上土), 즉 늘 술병을 차고 다니는 유영이 무덤에까지 술을 가져가지는 못한다는 뜻이라 하겠다.
 
애주가 문인들의 권주가를 논할 때 이백의 <장진주>와 그것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 송강 정철의 사설시조 <장진주사(將進酒辭)>를 빼놓을 수 없다. “한 잔(盞) 먹새 그려, 또 한잔 먹새 그려. / 곶 것거 산(算)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새 그려.”(꽃가지 꺾어 잔 수 세며 무진무진 먹세 그려.)라고 <장진주사>를 시작하는 송강은 “사대부 놀음 볼만했던 당쟁”으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비바람 그칠 날 없는 신세”더니 “죽은 뒤에도 그 비바람 그칠 줄 몰라 / 관작 삭탈당했다가 사면되었다가 / 이어 그 관작의 명예 되돌아오기도” 하는 삶을 살았다(‘정철’, 6권). 앞서 언급한 시의 귀재 이하가 진사시험을 보려 할 때 부친의 이름인 진숙의 진(晉)이 진사의 진(進)과 발음이 같아 휘(諱)를 범한다는 이유로 응시조차 못했던 것과 같은 불합리한 현실 속에서, 또는 송강이 처했듯 당쟁으로 얼룩진 암울한 현실 속에서, 이들에게 술이 주는 위안은 컸을 것이다. “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가 저녁에 흰 눈이 되었네”(朝如靑絲暮成雪)라고 인생을 노래하고, “오직 술 마시는 자만이 그 이름을 남긴다”(惟有飮者留其名)고 술을 권하는 이백(<장진주>)이나, 그와 더불어 술을 마시고 함께 ‘만고의 근심을 녹였을’ 두보에게는 술이 ‘반야탕’으로 인식되었을 법하다.
 
술이 필요한 순간들
고은 시인이 소년 시절의 기억을 서술한 글 속에 술이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장면들이 있다. 그 하나는 백범의 암살·타계 소식을 들은 마을사람들의 모습이다. “아, 하나의 죽음이 이렇게 커다란 것일 줄이야! 우리 마을의 한민당 계열이나 친일파나 극좌익의 몇 사람을 제외하면 마을의 늙은 아낙네까지 곡성을 내고 있었다. 당숙 고종식은 고씨들의 선산 꼭대기에 제청을 설치했다. 차일과 가마니를 두르고 바닥은 멍석을 깔았다. < … > ‘白凡 金九主席 神位’라고 쓴 위패를 모시고 어디서 구해 온 한독당 삐라에 박힌 김주석의 사진을 태극기와 함께 붙여 놓았다. 당장 미제 양조장에서 동복이 아저씨가 막걸리 한 말 들이 통을 서너 개 싣고 올라왔다. 마을의 남녀노소가 다 산으로 올라와서 술 취해서 엉엉 울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제 허벅지를 치며 탄식을 내뿜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어둡고 괴로워라……’ 하는 노래를 불러대기도 했다.”(<고은전집> 23권, ‘폐허의 영혼’, 김영사 2002, 340-341쪽)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기 42일 전인 1949년 5월15일 조선정치학관 개교 3주년 및 정치대학 승격 기념식에서 축사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고은 시인의 자서전에서 술이 필요한 순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장면은 앞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마음을 어지럽힌다. 한국전쟁 당시, 시인의 마을에서 인민군이 물러가자 마을사람들은 치안대를 조직해 경찰이 들어오기 전 인공협력자들을 보복학살하기로 한다. 치안대가 유엔군 소속 국군 한 명, 외국인 사병 한 명과 함께, 잡아들인 마을사람들을 이끌고―마을사람들이 마을사람들을 죽이는 것이다!―마을의 진산(鎭山)인 할미산으로 올라가 일본군 진지였던 한 굴속에서 죽이기 직전의 모습이다. “10월 9일 오후 새끼 꼬는 기계로 새끼 서너 뭉치를 꼬아 왔다. 그런 다음 아직 날이 저물지도 않았는데 너무 이른 저녁이 차려졌다. 미제부락의 양조장에서 막걸리 여섯 말을 실어 왔다. 밥상은 술상이 되었다. 치안대는 바로 취기가 어렸다. 특히 유엔군 흑인 병사는 그동안 막걸리 맛을 들였는지 그것을 바가지째 떠서 벌떡벌떡 마셨다. 국군도 알딸딸하게 취했다. 그러나 치안대장은 취하지 않았다. 기호와 나는 한두 잔 마셨다. 바로 전날밤 나는 미제부락에서 너무 많은 술을 마시고 길바닥에 뻗어 있는 것을 우리 동네 어른한테 업혀 왔으므로 아직도 속이 멍멍했다. 치안대장의 명령이 내려졌다.”(앞의 책, 457쪽)
 
죄인의 목을 베던 망나니―그 자신도 중죄인이라 불려나와 할 수 없이 그 일을 맡은―가 칼을 휘두르기 전 술을 마셔야 했던 것처럼, 하나의 공동체였던 사람들이 둘로 갈라져 죽고 죽이는 보복학살을 번갈아하던 마을의 전쟁은 술 없이 맨 정신으로는 견디기 힘든 ‘미친 세상’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돌 것 같은 시련의 순간은 4·3 제주에도 찾아왔고 5·18 광주에도 찾아왔다.
 
종구야
내가 니 애비니라
니 애비 혼령이니라
니 스물여섯살의 이승에서
내가 니 애비였느니라
니 애비가 도장공이듯
니도 도장공 되어
중동 열사(熱沙)의 땅 건설현장에 갔느니라
그곳 뜨거운 날들
모래바람의 날들 견디어
< … >
니가 이 애비한테
한 달에 20만원 30만원 보내왔느니라
그런 종구야
이런 종구야
내 아들아
한 달 전에 귀국하여
하필이면 5월 18일
광주에 내려와
총 맞아 죽었느니라
애비는 살아서
니 주검 찾다 찾다 쓰러졌느니라
 
망월동 빈 무덤
니 혼령만 묻고
날이 날마다
눈물로
막소주로 보내다가
애비도 니 간 곳 찾아 젠장 눈감아버렸느니라
그래서
이제 애비도 애비 혼령이고
니도 니 혼령이니라
 
< … >
(‘최종구’, 28권)
 
굴곡진 한국 현대사 속에서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지 못하고 수십 년간 숨죽이고 살아와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교동 낙지집에서 매운 뱃속에 소주를 털어 넣으며 독재에 숨죽인 울분을 달래던 70년대의 사람들에게, 단지 인간답게 살고 싶어 최루탄을 맞고 파업을 해야 했던 80년대의 사람들에게, 그 이전 그 이후의 모든 세월 속에서 고단한 하루하루를 살아갔고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들에게, ‘적절하게’ 조절해서 ‘자율적’으로 마시는 술이라면 작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지난 7월 제주 4·3 평화 공원에서 당시 행방불명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진혼무를 펼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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