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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고통대국에서 '함께 잘 사는 사회'로
2018-01-01 11:20:20 2018-01-01 11:24:40
임채원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새해 첫 일출에 투영된 우리 모두의 소망은 '잘 살게 해 달라'는 것. 문제는 얼마나 고르게 잘 살 수 있는가다. 한국은 2016년 기준 GDP 1조4112억달러로,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다. 영국 경제연구소인 경제경영연구소(CEBR)는 오는 2032년에는 한국이 중국과 미국, 인도, 일본, 독일, 브라질, 영국에 이은 세계 8위로 부상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때가 되면 국부도 프랑스를 앞지르게 된다.
 
이면에는 세계 1위의 '고통대국'이라는 그림자가 있다. 청년들은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 비관한다. '수저론'은 더 이상 기회의 공정이 없음을 보여준다. 희망과 기회 대신 불평등이 자리했고, 이는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암울한 국가 미래로 이어진다. 재벌 대기업의 독과점과 횡포, 청년실업, 비정규직 및 자영업자 비율, 노인빈곤율, 불행도, 자살률 등에서 한국은 세계 1위의 ‘고통대국’이다. 산업재해 사망률, 가계부채, 남녀 임금격차, 청소년 흡연율, 저출산, 낙태율, 이혼 증가율 등에서도 부끄러운 1위다.
 
정책의 전환이 절실하다. 잘못된 길을 멈추고, 처한 현실을 냉정히 돌아봐야 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으로는 신자유주의가 몰락하고 새로운 경제정책이 꾸준히 모색돼 왔다. 1980년대 대처와 레이건 집권 이래 효율과 시장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기업과 정부들이 예상치 못한 2008년 위기를 겪으면서 고삐 풀린 자본주의를 더 이상 신뢰하지도, 지속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 국제노동기구(ILO) 등 노동계는 소득주도성장의 원형이 된 임금주도성장(Wage-led growth)을 기존의 자본주도성장과 대비되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제시했다. 영미 리버럴들에 의해 신자유주의를 대체하는 포용적 자본주의가 제안됐고, 효율만을 추구했던 영미 경영계에서는 마이클 포터(M. Porter)가 제기한 공유가치창출(Creating shared value)이 새로운 담론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국정운영의 패러다임에서도 민간과 정부가 공적가치를 공동생산하고 공동으로 책임지는 관계국가론(Relational state)이 제시됐다.
 
반면 한국은 이 흐름에 역행하며 보수정부 10여년을 고통 속에서 지냈다. 이명박정부에서는 4대강이라는 토건경제와 자원외교라는 사욕과 탐욕의 끝을 온 국민이 지켜봐야 했다. 박근혜정부에서는 창조경제라는 말 잔치 아래 박정희 개발독재의 정경유착을 다시 겪어야 했다. 세계적 경제위기 이후 다른 나라들이 발 빠르게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음에도, 한국은 시대역행적인 경제 패러다임으로 더 깊은 고통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경제 패러다임을 크게 자유시장경제와 조정시장경제로 구분한다면, 한국은 지금까지 자유시장경제 한 방향으로만 달려왔다. 개발독재의 발전국가는 자유시장경제의 가장 퇴행적인 형태였으며, 그 이후 보수정부들도 입으로는 자유시장경제를 말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재벌 중심의 정경유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 나라는 영미식 자유시장경제를 한국이 지향해야 할 방향으로 받아들이길 강요해 왔다. 그 결과가 세계 1위의 고통대국이다.
 
촛불혁명은 고통대국의 늪에서 쌓인 불만과 불안이 놀라운 시민적 힘으로 폭발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촛불혁명으로 탄생된 문재인정부는 앞서 보수정부들이 걸었던 자유시장경제를 벗어나 '조정시장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y)'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소득주도성장론은 그러한 관점에서 새로운 모색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도 잠시, 일각에서는 재벌과 보수언론, 관료들에 의해 기존 성장론이 옷만 갈아입고 재등장하고 있다. 과감한 방향 전환으로 퇴행을 막아야 한다. 자유시장경제에서 조정시장경제로 대전환을 하겠다는 사회적 합의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유럽식 사회혁신 등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고, 혁신도 기존의 기술에서 지역과 사회 등으로 그 담론을 넓혀야 한다. 기업과 지방정부, 시민단체, 협동조합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아래로부터 아이디어를 공유, 시범과 실행 단계를 거쳐 확장하는 혁신 패러다임이 모색될 수도 있다.
 
시민들이 바라는 것은 허울뿐인 경제대국이 아니다. 내 삶이 좀 더 나아지고 모두가 어우러지는 실질적인 경제정책의 변화와 효과를 원한다. 시민들은 예측 가능한 미래를 설계하고 싶어 한다. 정부도 소득주도성장 담론을 뛰어넘는 과감하고 적극적인 조정시장경제로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해야 한다. 2018년에는 대한민국이 가보지 않은, 그러나 많은 서구 국가들에서 검증된 조정시장경제의 구체적인 정책들이 나오길 희망한다. 더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 사는 것. 대한민국 경제의 절박한 과제다.
 
임채원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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