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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인디언 깃털, 주름 치마…혁오 사이키델릭 ‘신음악’
카메룬 예술가 음악 틀며 시작…미술관 같은 신묘 예술 세계
8분 46초 대곡, 우주 같은 황홀경 “모든 것, 사랑으로 볼 수 있어”
2020-02-12 06:00:00 2020-02-13 00:15:37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프란시스 버베이(1929~2001). 공연 직전 짙게 깔리던 곡은 카메룬 출신 이 생경한 예술가의 음악이었다. 콩가와 봉고 드럼의 아프리칸 비트, 귀곡성 같은 울림이 제 3세계의 거대 밀림을 만들었다. 야자유 열매가 연상되는 대서양 풍광(‘Bissau’)은 아프리카 타악기들이 빚어내는 황홀경, 토속적 세계(‘Sanza tristesse’)로 관객들을 당겼다. 클래식컬 기타와 재즈, 사이키델릭 요소를 카메룬 댄스뮤직 마코사에 뒤섞은 소리 실험. 흰 막으로 본 무대를 가린 채 틀어준 이 짧은 음악 뒤에는 이어지는 물줄기처럼 ‘그들’의 신음악(新音樂)이 흘러 나왔다. 
 
혁오 공연 시작 전. 푸른 조명에 흰 막 커튼이 쳐져있는 무대를 보며 관객들은 버베이 음악에 몸을 흔들었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유령 소리 같은 정체불명 한국어가 객석을 들썩였다. ‘알아가거나 잊어가거나/ 사랑하거나 슬퍼하거나(곡 ‘Silverhair Express’)’ 
 
동시에 천천히 막이 오른 무대에는 버베이 음악 만큼이나 신묘한 예술 세계가 펼쳐졌다. ‘ㄷ’자 모양의 흰 벽면과 공연장 전체를 물들이는 샛노란 조명, 시스루 스크린 사이로 얼핏 보이는 4개의 인디안 형상 깃털 모자들…. 미술관 화이트큐브를 연상시키는 이 공간에서 피어오른 이들의 새 음악관은 신세계 토착 문명을 맞닥뜨리는 것처럼 다가왔다.
 
지난해 미국 ‘코첼라’(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가 왜 그들을 택했는지 깨달은 시간. 9일 서울 블루스퀘어 아이마켓홀에서 열린 밴드 혁오의 단독공연은 그 증명의 현장이었다. 올해 19개국, 42개도시로 이어질 이 투어로 밴드는 세계적인 도약에 나선다.
 
밴드 혁오 공연.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초반부터 파격적인 인디언 형상의 멤버들은 사이키델릭한 신음악으로 ‘환각 세계’를 열었다. 두 대의 일렉 기타와 베이스기타, 드럼에 전자음을 섞어 만든 소리들은 후기 비틀즈를 연상시킬 정도로 강렬했다.
 
노란 조명 아래 기묘한 주술가 같던 곡 ‘Silverhair Express’의 풍경은 늑대 포효 같은 오혁(보컬, 기타)의 목소리와 기타 폭발의 맞물림으로(‘Hey Sun’),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피리와 젬베 소리의 변화무쌍함으로(‘Help’) 무한히 변주됐다. 흰 벽면들을 채우던 노랑 조명은 파랑으로, 다시 초록, 빨강, 무지개색으로 곡 무드에 맞춰 부지런히 변형됐다.
 
공연의 최대 변곡점이자 절정은 곡 ‘New born’ 때의 순간. 총 길이 8분 46초에 달하는 이 대곡의 압도적인 서사는 명멸하는 하얀 조명에 섞여 우주 황홀경 같은 풍광을 만들었다. 곡 중반부까지 거친 질감의 기타 사운드가 리드하던 곡은 오혁의 웅얼거리는 영어가사로, 비행장을 연상시키는 굉음 같은 소리의 합들로 이어졌다. 드림 팝, 슈게이징을 연상시키는 몽환성과 실험성은 잠시 덴마크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 뮤(Mew)를 떠올리게도 했다.
 
밴드 혁오. 사진/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
 
총 세 차례 분위기를 바꾼 이날의 공연 연출은 파격적이었다. 인디언 깃털모자로 무대에 오른 멤버들은 막이 새롭게 오를 때마다 강아지 모형 모자, 주름 잡힌 긴 치마 같은 파격적인 패션 아이템을 무대로 올리며 장내를 ‘런웨이’로 만들었다. 아시아 다양성을 포용하는 디자인 브랜드 커미션 NYC의 작품과 세계적 패션 아티스트들과의 협업. 통 큰 바지와 오버핏 정장의 이른바 ‘혁오 패션’ 차림의 대다수 관객들이 열광했다.
 
이날 밴드는 최근 발표한 새 EP ‘사랑으로(through love)’ 전곡을 실연했다. 앨범 수록곡들은 차별과 혐오, 세대 갈등, 환경파괴로 점철된 이 세상에 돌파구이자 해결책으로 ‘사랑’을 제안한다. 곡 제목이나 가사에 등장하는 어둠과 빛은 사랑 무(無)의 현실, 그럼에도 결국 사랑을 찾고 마는 인간에 대한 은유다. 밴드가 “사랑은 여전히, 유일하게, 모순과 부조리의 골짜기에서 신음하는 우리에게 손을 뻗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장석주 시인의 시 구절을 앨범 소개글로 걸어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영국 권위있는 미술상인 터너상을 수상한 독일 사진작가 볼프강 틸만스의 2011년작 . 다종의 식물이 한데 섞인 길가의 화단을 찍은 사진이다. 그 속도는 각각 다르지만 다 함께 시들어가고 있는, 그러나 여전히 모두가 살아있는 이 장면을 밴드는 월드투어 공식 이미지로 차용했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최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우한 폐렴) 우려가 확산되는 상황에도 이날 관객들은 마스크를 쓰고 1, 2층 객석을 가득 메웠다. “재난 영화 보는 것 같다”던 밴드는 마지막 즈음 앨범에 담긴 의미심장한 뜻을 이날 모인 관객들과 나눴다.
 
“차별, 비교, 편 가르기 많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걸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사랑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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