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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허위사실 말해도 전파 가능성 없으면 명예훼손죄 아냐"
"단둘이 있는 곳에서 발언…공연성 없어 보여"
벌금 500만원 선고 원심 무죄 취지 파기 환송
2020-02-16 09:00:00 2020-02-16 09:00:00
[뉴스토마토 정해훈 기자] 허위사실의 내용을 말했더라도 다수의 사람에게 전파될 가능성이 없다면 이를 명예훼손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배모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벌금 5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춘천지법에 돌려보냈다고 16일 밝혔다.
 
재판부는 "명예훼손죄의 구성요건인 공연성은 반드시 불특정 또는 다수인이 동시에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므로 비록 개별적으로 한 사람에 대해 사실을 유포했다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불특정 또는 다수인에게 전파될 가능성이 있다면 공연성의 요건을 충족한다"며 "그러나 이와 달리 전파될 가능성이 없다면 특정한 한 사람에 대한 사실의 유포는 공연성이 없다"고 판시했다.
 
또 "전파 가능성이 있는지는 발언을 하게 된 경위와 발언 당시의 상황, 행위자의 의도와 발언 당시의 태도, 발언을 들은 상대방의 태도, 행위자·피해자·상대방 상호 간의 관계, 발언의 내용, 상대방의 평소 성향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구체적인 사안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전파 가능성을 이유로 명예훼손죄의 공연성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범죄 구성 요건의 주관적 요소로서 공연성에 대한 미필적 고의가 필요하므로 전파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있음은 물론 나아가 그 위험을 용인하는 내심의 의사가 있어야 한다"며 "그 행위자가 전파 가능성을 용인하고 있었는지는 외부에 나타난 행위의 형태와 상황 등 구체적인 사정을 기초로 일반인이라면 그 전파 가능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고려하면서 행위자의 입장에서 그 심리 상태를 추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전경. 사진/뉴스토마토
 
배씨는 김모씨의 부인과 아들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기소됐다. 김씨는 변모씨의 재산을 관리해 주는 역할을 했는데, 김씨가 2013년 10월 사망한 이후에는 배씨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변씨는 A씨에 대해 4억원 상당의, B씨에 대해 1억원 상당의 대여금 채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 배씨는 2013년 11월 A씨에게 "김씨가 병실에 누워 있는 자리에서 부인과 아들이 재산 문제로 크게 다퉜다"고 말하고, 그해 12월 B씨에게 "부인이 김씨를 간호하지도 않고, 치료받지도 못하게 했으며 병원비도 내지 않았다. 부인과 아들이 김씨의 재산을 모두 가로챘다"고 말한 것으로 조사됐다.
 
1심은 "A씨와 B씨가 피고인에게서 들은 말을 불특정 또는 다수인에게 전파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공연성이 있다"며 배씨에게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이에 대해 "말을 들은 사람이 그 말을 전파하지 않고 비밀로 지켜줄 만한 사실적시자 또는 피해자와의 특별한 친분이 있거나 비밀엄수 의무가 있는 직무를 담당하는 경우라야 전파 가능성이 없다고 할 것"이라며 "그런데 피고인의 말을 들은 A씨 등은 피고인이나 피해자인 김씨의 부인, 아들과 아무런 친분이 없고, 비밀엄수 의무가 있는 직무를 담당하고 있지도 않다"고 판결했다.
 
2심은 "원심에서 적법하게 채택해 조사한 증거들을 기록에 비춰 면밀히 검토해 보면 원심이 그 판시와 같은 이유로 피고인의 발언에 공연성이 인정된다고 판단한 것은 정당한 것으로 수긍이 간다"며 배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원심판결에는 명예훼손죄에서의 공연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며 항소심 판단을 뒤집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발언한 경위와 내용, 발언 당시의 상황, 피고인과 A씨, B씨 또는 피해자와 A씨, B씨의 관계 등에 비춰 보면 피고인의 발언이 전파 가능성이 있었다거나 피고인에게 전파 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그 위험을 용인하는 의사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고인은 A씨, B씨와 단둘이 있는 가운데 발언했고, 그 내용도 피해자들과 김씨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매우 사적인 내용"이라며 "A씨, B씨는 피고인이나 피해자들과 알지 못하던 사이였고, 다만 김씨가 사망하자 김씨가 관리하던 자신들에 대한 채권의 채권자가 변씨인지 아니면 김씨를 상속한 피해자들인지에 관한 분쟁이 발생해 그 과정에서 서로를 알게 됐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A씨, B씨가 알게 된 피고인의 발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알릴 이유가 없어 보인다"고 밝혔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전경. 사진/뉴스토마토
 
정해훈 기자 ewigjung@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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