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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반란수괴·국민학살' 죄인 전두환, 사과도 반성도 없이 죽다(종합)
육사 11기 동기 노태우와 하나회 결성…12·12 군사반란 주도
쿠데타로 집권후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군부 독재 7년
퇴임 후에도 참회하는 모습 없어…'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까지
2021-11-23 17:02:27 2021-11-23 19:37:28
 
[뉴스토마토 최병호 기자]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뒤 대통령에까지 오른 전두환씨가 23일 사망했다. 향년 90세다. 전씨는 군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를 만들고 12·12 쿠데타를 주도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유혈로 진압했다. 국군이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게 한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했다. 전씨는 반란수괴 죄목 등으로 구속됐지만, 풀려난 뒤에도 사과와 반성하는 모습은 없었다. 오히려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서서도 관련 사실을 부인했다. 하지만 독재자도 죽음 앞에는 무력했다.

육사 11기 입교…'반란동지' 노태우와 하나회 결성
 
전두환씨는 1931년 1월18일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1951년 대구공고를 졸업한 뒤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했다. 그는 육사에서 평생의 동지인 노태우 전 대통령을 만났다. 두 사람은 같은 방을 썼다고 한다. 전씨는 운동에 소질을 보였고, 동기들보다 1살 많아 리더를 맡았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은 후일 육사 11기를 주축으로 구성된 하나회의 핵심 멤버가 된다. 하나회는 4공화국 당시 만들어진 군내 불법 사조직이다. 
 
8월9일 전두환씨가 고 조비오 신부 사자명예훼손 혐의에 대한 항소심 재판을 받은 뒤 부축을 받으며 광주 동구 광주지방법원을 나가고 있다. 사진/뉴시스
 
전씨의 인생이 전환점을 맞은 건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 쿠데타다. 전씨는 5·16 이후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육사 생도 및 장교단의 '혁명 지지 행진'을 기획·주도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박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정치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전씨는 이후 육군 인사참모부와 인사과장과 수도경비사령부 대대장,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공수특전여단장,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 1사단장 등의 군 핵심 보직을 두루 거쳤다. 전씨는 박 전 대통령이 피살된 1979년 10월26일에는 국군 보안사령관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피살되자 전씨와 하나회 등 군부세력은 12·12 반란을 감행했다. 전씨는 직속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군대를 마음대로 움직였다. 명백한 군사반란이자 내란이었다. 반란에 성공한 전씨는 정 총장 등 쿠데타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사임시켜 권력을 장악했다.
 
1980년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씨에게 대장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사진/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5·18 민주화운동, 광주 피로 진압…간접선거로 7년 집권
 
전씨는 권력을 찬탈한 것도 모자라 독재까지 계획했다. 이를 위한 권력욕도 집요했다. 전씨는 우선 1980년 5월17일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정당과 정치활동 금지, 국회 폐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등을 단행됐다. 이 과정에서 학생과 정치인, 재야인사 등 2699명이 구금됐다.
 
비상계엄령 선포 하루 뒤 광주에선 군부의 조처에 반대한 시민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다. 독재에 맞선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시위였다. 하지만 전씨는 군대를 투입, 시민들을 유혈 진압했다. 5·18진상규명위가 8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5·18 당시 사망한 민간인(잠정)은 167명이었다.
 
1980년 전두환씨가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한 뒤 청와대에서 경축만찬을 열고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전씨는 비상계엄령 선포와 국민 학살의 여세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사임을 압박했다. 결국 그해 8월 최 대통령이 물러나자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한민국 11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른바 체육관 선거였다. 이어 정당해산령을 내려 여러 정당을 해산하고, 10월27일 '7년 단임' 대통령제 헌법을 공포한 뒤 간접선거로 1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제5공화국의 출범이었다. 
 
전씨는 독재 연장을 위해 우민화 정책과 국민 탄압 등 당근과 채찍을 병행했다. 대표적인 게 '3S정책'이다. 3S란 스포츠(Sports), 성(Sex), 영상산업(Screen) 등을 뜻한다. 군부는 1981년 10월 '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데 이어 1982년엔 프로야구, 1983년엔 프로축구와 농구대잔치 등을 출범시켰다. 정권 차원에서 에로영화 제작을 지원, 1982년 극장 개봉작 56편 가운데 무려 35편이 '애마부인' 등 에로영화일 정도였다. 대학생 시위를 말살하고자 학원안정법을 제정했고, 대학 내에 정보형사와 경찰 프락치가 상주하며 학생들을 감시했다.  
 
1986년 무렵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거세지고, 급기야 정치권에선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빗발치자 전씨는 민심을 수습하려고 '평화의댐 사업'이라는 대국민 사기극까지 벌인다. 우선 군부는 북한이 1988년 개최될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고자 금강산댐을 만든 뒤 이를 폭파하는 방식으로 200억톤의 수공(水攻)을 준비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북한의 남침 불안감에 휩싸인 국민은 평화의댐 준공을 위한 성금 모금을 벌였다. 전체 공사비 1700억원 중 639억원 정도가 국민이 십시일반 낸 돈으로 충당됐을 정도였다. 이로 인해 개헌을 요구하던 야당과 국민 여론,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는 크게 위축됐다. 하지만 나중에 이 일은 전씨의 심복인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2차장 등이 기획한 걸로 드러났다. 일종의 북풍이었다. 
 
1987년 전두환씨가 청와대에서 제1회기술진흥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군부의 실정이 계속되자 독재에 맞선 민주화 요구가 들불처럼 번져갔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1986년 6월)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년 1월) 등이 연이어 벌어지자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전씨는 1987년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으나 6월 민주항쟁을 겪자 직선제 개헌을 전격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후계자로 반란동지 노태우 전 대통령을 내세웠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12월16일 13대 대선에서 36.64%를 득표, 김영삼 통일민주당 후보(28.03%)를 제치고 당선됐다.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았지만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 실패가 결정적 패착으로 작용했다. 당시 양김 분열로 영·호남은 둘로 갈렸다. 
 
퇴임 후 반란수괴 죄목으로 무기징역…반성·사과 없어 

전씨는 노 전 대통령 당선 후에도 민주정의당 총재로 남아 막후 권력을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집권 뒤 '5공 청산'을 염원하는 여론을 의식, 전씨를 홀대했다. 결국 전씨는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한 뒤 부인 이순자씨와 함께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갔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전씨는 드디어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게 됐다. 1995년 전씨와 노 전 대통령은 나란히 구속됐다. 12·12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의 주범으로 지목된 것. 전씨의 혐의는 반란수괴·내란수괴·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이다. 전씨는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2심 무기징역,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이 확정됐다. 전씨는 15대 대통령 선거 이틀 후인 12월20일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풀려난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는 모조리 박탈됐다. '전두환 대통령'이 아닌 '전두환씨'가 된 것.

전씨는 이후에도 반성은커녕 자신의 권력 찬탈을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파렴치함을 보였다. 전씨는 2003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대법원에서 선고받은 추징금도 완납하지 않았다. 유명한 "29만원 전재산" 발언이 이때 나왔다. 2017년 내놓은 회고록엔 자신에게 유리한 서술만 일삼았고, 내용 중 고 조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돼 최근까지도 재판을 받았다.
 
비록 반란동지이긴 했어도 자숙하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자중한 노 전 대통령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지난 10월26일 별세한 노 전 대통령은 유언을 통해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이 용서를 바란다"고 했다. 특히 5·18과 관련해 아들 노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씨는 여러 차례 광주의 5·18 민주묘지를 찾아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했다. 노 전 대통령은 추징금 납부를 마쳤지만, 전씨는 "계좌에 29만원 밖에 없다"면서 노추를 부렸다. 
 
23일 전두환씨의 시신이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장례식장으로 운구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전씨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지난 8월9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전씨를 생전까지 보필한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전씨 사망과 관련해 연희동 자택 앞에서 기자들에게 "(전씨는) 평소에도 죽으면 화장해서 그냥 뿌리라고 가끔 말씀하셨다"며 "가족은 유언에 따라 그대로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민 전 비서관은 전씨의 회고록 3권을 인용하며 "유언은 북녘 땅이 내려다 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 남아 있고 싶다는 것"이라고 했다. 민 전 비서관에 따르면 전씨가 5·18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따로 남긴 말은 없었다. 반란수괴이자 국민학살범인 전씨는 사과도 반성도 없이 그렇게 죽었다.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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