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창경 재테크전문기자] 주식을 잘 몰라도 돈이 많거나 전문직이라면 전문투자자가 될 수 있는 현행 규정에 대한 문제 제기가 끊이질 않습니다. 개인 전문투자자는 전문종목으로 지정된 비상장주식 거래와 주가연계증권(ELS) 등을 투자하는 데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그들만의 리그’로 여겨지는 사모펀드 투자나 차액결제거래(CFD)도 차등 대우합니다. 전문가들은 투자 손실 감내 능력을 직업과 금융투자 자산으로 나누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30년 주식해 집 사도 전문투자자 아냐
투자자 A씨는 최근 개인 전문투자자로 등록하기 위해 증권사 지점을 찾았다가 퇴짜를 맞았습니다. 주식투자 경력이 30년에 육박하는 데다 주식으로 돈을 벌어 집도 장만한 그였지만 등록 요건에 미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금융투자 순자산이 5억원 이상이어야 하는 필수조건은 충족했지만, 동시에 1년 이상 주식계좌로 월평균 5000만원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는 조건에서 탈락했습니다.
A씨는 일반 주식계좌와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개인퇴직연금계좌(IRP) 등에서 총 2억원 상당을 국내외 주식과 주식형 상장지수펀드(ETF)로 투자 중이었지만, 증권사 직원은 세제혜택 계좌의 경우 5000만원 산정에서 제외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AA등급 이상 채권과 머니마켓펀드(MMF), 환매조건부채권(RP) 등 안정성 자산도 제외된다고 덧붙였습니다.
(출처=KB증권 홈페이지 갈무리)
지점에 미리 문의해 각종 서류를 떼어갔던 A씨는 실망했지만, 그보다 놀란 것은 변호사 등 전문직의 경우엔 전문투자자로 등록할 수 있단 얘길 듣고 나서입니다. 주식을 잘 모르는 변호사 친구도 자신에게 주식을 묻는데, 그 친구는 전문투자자가 될 수 있고 30년 투자한 본인은 불가능하단 사실에 화가 났습니다.
A씨처럼 전문투자자로 등록하고 싶어도 문턱을 넘지 못하는 투자자들이 많습니다. 개인 전문투자자 제도는 2009년 자본시장법을 제정하면서 도입됐습니다. 투자 지식과 경험, 재력을 두루 갖춘 투자자들에게만 위험 영역의 투자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는 의도였는데요. 2018년 진입 요건이 완화되면서 등록이 가능한 투자자의 범위도 조금 넓어졌습니다.
숙려제도·전문종목, 형식적 투자자 보호
주식과 채권 등에 투자하는 경우 전문투자자 자격이 없어도 투자하는 데는 큰 불편함은 없습니다. 다만 일부 영역에서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ELS 또는 파생결합증권(DLS)에 투자하는 절차입니다. ELS에 청약하는 과정에 투자숙려기간이 있는데요. 일반투자자는 상품청약 마감일보다 2~3영업일 먼저 청약해야 합니다. 2~3일이 지나 증권사에서 가입 동의의사를 물으면 이때 최종 청약 여부를 확정하게 됩니다.
이 제도는 ELS 청약 후 마감 전까지 3영업일 동안 이 상품에 투자할지 말지를 다시 고민(숙려)하라는 의도로 도입했지만, 정작 투자자들이 증시 변화를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며칠 사이 투자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돼 그에 맞는 상품에 청약하고 싶어도 숙려기간 중엔 일반인이 청약할 수 없어 해당 상품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전문투자자는 숙려제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청약 마감 시간을 코앞에 두고 신청해도 됩니다.
고난도 상품 숙려제는 지난 2019년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에 따른 후속조치로 2021년 5월에 도입됐습니다. 투자자 보호를 위해서라곤 하지만 제도 시행 후 2023년 또 홍콩ELS 사태가 발발한 것처럼, 투자자 보호보다는 판매사들이 책임을 면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로 활용되는 성격이 강합니다.
전문투자자가 되지 못해 불편한 또 다른 한 가지는 비상장주식 투자입니다.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된 비상장주식 플랫폼에서 거래되는 비상장주를 일반종목, 전문종목으로 구분한 것이 2022년입니다. 그 전엔 모든 투자자가 모든 비상장주식을 거래할 수 있었지만 이때부터 일반인은 일반종목만, 나머지 비상장주식은 전문투자자들만 거래 가능한 전문종목으로 바뀌었습니다. 제도 도입 전부터 전문종목을 보유 중이던 일반인 주주라도 해당 주식을 매수할 수 없게 됐습니다.
문제는 투자자 보호를 위해 일반종목, 전문종목으로 분류했는데 투자 안정성이 높은 우량 비상장기업들이 여전히 전문종목으로 지정돼 전문투자자만 거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밖에도 CFD나 사모펀드 및 크라우드펀드 가입에서도 일반인은 아예 차단되거나 최소 투자금액, 가입한도 등으로 차등 대우를 받습니다. 그나마 장내 선물·옵션 거래의 경우 일반인도 사전교육과 모의투자, 예치금 납입 등으로 가능해 문턱이 낮은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전문투자자, 취지에 부합하나?”
이같은 현실에 전문투자자 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손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특히 전문투자자 지정 요건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전문투자자가 되려면 A에게 요구했던 것처럼 최근 5년 중 1년간 주식계좌로 월평균 5000만원 이상 유지하는 것이 필수조건입니다. 여기에선 각종 세제혜택 계좌가 제외되며 원리금 보장 가능성이 높은 각종 금융상품도 5000만원 산정에서 빠집니다.
필수조건을 갖춘 사람 중에서 △직전연도 연봉이 1억원 이상이거나 부부합산 1억5000만원 이상 △부부합산 거주부동산 금액 제외한 순자산 5억원 이상 △변호사, 회계사, 감정평가사, 변리사, 세무사, 투자자산운용사 등 전문직 중 하나의 조건에 해당하면 가능합니다.
결국 현금자산이 많거나 많이 벌거나 전문직이면 전문투자자가 될 가격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통해 투자자의 손실 감내 능력을 가름한다는 의도인데요. A씨는 이 기준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는 “30년 주식 투자해서 아파트도 장만했고, 지금도 세제혜택 계좌이긴 하지만 엄연히 2억원 정도를 주식에 투자하고 있는데, 매번 내게 종목과 기업 재무에 대해 묻는 변호사 친구가 나보다 전문적인 투자자인 게 맞느냐”고 말했습니다.
손실 감내 능력에 대한 평가 기준도 문제가 보입니다. 현재 기준으론 전 재산을 주식에 올인해 5억원 정도를 주식계좌로 보유 중이라면 전문투자자가 될 수 있지만, 시세 20억원 자가 아파트를 보유한 투자자가 4억원 정도를 금융투자상품과 주식으로 운용하는 경우엔 전문투자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손실 감내 능력에선 후자가 월등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밖에 전문투자자 요건에 투자 경험이 빠져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1년간 월평잔 5000만원 유지로 경험을 따지는 것은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개인전문투자자 자격에 대한 문제 제기는 오래전부터 이어졌습니다. 2019년 1월 금융위원회가 내놓은 ‘개인 전문투자자 진입요건 개선방안’에 대해 자본시장연구원에선 “개선방안에 따르면 금융투자상품의 잔고 요건을 만족하는 개인투자자가 특정 자격증만 소지하고 있으면 전문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어 전문투자자 제도의 본래 취지에 부합하는 것인지 의문이 있다”는 내용을 담은 평가보고서를 냈습니다.
2016년 6월 자본시장법 시행령을 개정해 금융투자상품 잔고 요건을 50억원에서 현재 5억원으로 대폭 낮추면서 전문투자자 숫자는 조금 늘었지만, 2019년 개선안에 대한 문제 제기는 6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김창경 재테크전문기자 ckkim@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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