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음모설에 감염돼 병들어가는 한국 사회
2025-08-01 06:00:00 2025-08-01 06:00:00
1997년에 개봉되었던 헐리우드 영화 <컨스피러시(Conspiracy Theory)>는 음모설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줍니다. 뉴욕시의 택시 운전사 제리 플레처(멜 깁슨)는 상수도 불소 첨가물에서 국제금융거래에 이르기까지 작건 크건 현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뒤에는 음모가 자리 잡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음모론에 자신의 가설을 더해 상상의 날개를 펼치며 택시 안에서 손님들과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그러다 미국인이 가장 관심이 있는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 음모론에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 실제로 현직 대통령 암살 기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됩니다. 주인공이 상상한 대통령 암살 음모가 후반부에 사실로 드러나면서 영화는 액션물로 변질되어 황당하게 끝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딱 이 영화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온 나라에 수많은 음모론이 퍼져 있고 국민들은 각자 자신이 믿는 음모론이 사실일 거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음모론을 믿느냐에 따라 정치적 성향과 정파적 지지가 갈리며, 심지어 서로 대립하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끼리는 가족이나 친구라 할지라도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음모설은 사회심리학적으로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사람들이 음모론에 매료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합니다. 우선, 가벼운 이야깃감으로 재미있습니다. 사랑방에 둘러앉아 돌아가며 이야기보따리를 풀 때 음모론을 꺼내면 호기심을 자극해 주목을 받습니다
 
오늘날의 사랑방은 유튜브이고 이야기꾼은 유튜버입니다. 옛날의 입담 좋은 이야기꾼은 박수를 받았지만, 현대의 인기 유튜버는 돈을 법니다. ‘좋아요와 구독자 수가 늘어나면 이에 상응해 명성이 높아지고 수익이 올라갑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말하면 튀지 못합니다. 검증되지 않은 음모론을 최초로 터뜨려야 많은 사람이 혹하면서 솔깃해져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니 유튜버는 음모론의 창작자가 되고 유튜브는 음모론의 진원지가 되는 겁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거나 이유를 알지 못하는 사건을 이해하는 방편으로 음모설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가령, 이집트 피라미드를 외계인이 건설했다고 추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슷한 연유로 천안함 사건이나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 다채로운 음모론이 판을 쳤습니다. 특히, 수백 명의 생명을 불시에 앗아간 세월호 침몰은 워낙 충격적이라 음모론이 진실보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선주, 선장, 조타수 서너 명의 실수로 비극적인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아 다른 이유를 찾으려는 시도에서 여러 음모론이 등장했습니다
 
본인의 신념과 달라 수긍하기 어려운 사건에 대해 합리화하기 위해 음모설을 추론하여 신봉하기도 합니다. 믿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고 믿고 싶지 않은 것은 거부하는 확증편향 성향이 강한 사회에서 음모론이 팽배합니다. 부정선거론이 대표적입니다. 선거에서 이길 거라 믿었지만 패배한 경우 그 원인을 선거 부정에서 찾습니다. 부정선거를 입증하는 증거가 나오지 않아도 그것조차 은폐라는 또 다른 음모론으로 치부하며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습니다
 
사회적 불안이 커지거나 위기가 닥쳐올 때는 음모설이 유언비어처럼 확산됩니다. 몇 년 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감염병이 전 세계를 덮쳤을 때 떠돌았던 음모론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당시에 백신과 관련된 음모론은 공상과학소설 수준이었습니다. 백신을 통해 초소형 로봇이 몸 안에 침투해 심신을 조정한다거나 백신을 맞으면 DNA가 변형돼 몇십 년 후에 다른 인종으로 진화한다거가 하는 루머가 돌았습니다
 
음모설은 정치적 도구로도 이용됩니다. 반대파를 공격하거나 지지층을 결집할 때 음모론이 아주 유용합니다. 권력투쟁의 무기로 음모론을 창작하고 유포하며 확대하는 메커니즘이 만들어집니다. 대체로 유튜브에서 음모론이 시작되고, 이를 언론이 받아 재생산하며, 국회나 정치권에서 공론화하면, 다시 유튜브에서 받아 가공하는 생태계가 조성됩니다. 권력과 결탁한 음모론은 여론을 흐리고 국민을 혼돈에 빠뜨리는 악영향을 미칩니다. 그럼 작용과 반작용의 역학이 작동해 반대 음모론도 강하게 대두되어 진실은 가려지고 음모론만 판치는 세상이 됩니다. 이 와중에 '아니면 말고'식의 거짓 소문을 퍼뜨려 이권과 자리를 쫓는 음모론자들이 득세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두 번의 대통령 탄핵과 급작스러운 정권 교체가 발생하면서 진영이 갈린 채 국론이 분열되고 음모설이 진실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가 계속 악화하면 내전으로 번질지도 모른다는 기우까지 들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말세론이 다시 꿈틀댑니다. 절망과 비관이 지배하는 암흑기에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해줄 메시아를 기다리는 심정이 간절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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