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지웅 기자]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미국과의 관세 후속 협상에서 성과 없이 귀국했습니다. 미국이 일본식 '백지수표' 투자를 요구했고, 한국은 직접투자 비중을 줄이고 투자처·이익 배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지만 접점을 찾지 못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협상 장기화는 불가피해졌고, 동맹의 균열 우려까지 짙어지고 있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일본처럼 퍼주지 않으면 상호관세 25%"
김정관 장관은 14일 새벽 인천공항에 도착해 협상 성과를 묻는 질문에 "양자 간 협의가 진행 중"이라며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습니다. 최소한 긍정적 신호 없이 원론적 언급에 그친 것은 '빈손 귀국'이라는 평가입니다.
앞서 산업부·기획재정부 합동 실무대표단은 지난 8일(이하 현지시간) 미국에서 미 상무부와 무역대표부(USTR) 관계자들을 만났습니다. 관세 협상 타결 내용을 문서화하는 등 후속 조치를 논의했지만, 협의는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에 김 장관은 후속 협의를 직접 이끌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고, 12일 뉴욕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 만나 합의를 시도했습니다. 관례상 협상에서 작은 진전만 있어도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수준의 언급은 나오지만, 장관급 회담 뒤에도 양측은 일절 설명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이견은 3500억달러(약 487조원) 대미 투자의 세부 구조를 결정하는 데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미국 측은 "자국이 원하는 곳에,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방식으로 투자해달라"면서 사실상 '백지수표' 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곧 '미국 퍼주기'인 일본식 모델을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미·일 합의와 관련한 백악관이 공개한 행정명령에는 투자처 선정의 주체가 '미국 정부'로 명시됐으며 "일본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관세 조정을 검토할 수 있다"는 내용도 담겼습니다.
이를 두고 미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미국이 관세를 인상할 권리를 명시해 관세가 계속해서 레버리지의 원천으로 사용될 것임을 시사한다"며 "트럼프 행정부는 다루지 않은 새로운 관세를 부과하기로 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동맹 한국'에 대한 미국 측 태도는 강경합니다. 러트닉 장관은 11일 <CNBC> 인터뷰에서 "일본은 계약서에 서명했다"며 한국과 일본을 직접 비교했습니다. 그는 "한국은 그 협정을 수용하거나 관세를 내야 한다"며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따르지 않으면, 상호관세를 25%로 다시 올릴 수 있다는 뜻을 시사했습니다
미국 현지에서 한·미 관세협상 관련 후속 협의를 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4일 오전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트럼프 합의 신뢰 못 해"…미 경제학자의 경고
한국은 향후 발표될 의약품·반도체 관세에서도 '보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합의한 15%의 자동차 관세도 '문서화 지연'으로 여전히 25%를 적용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의 전례를 따른다면, 전략산업 공급망을 본토에 구축하겠다는 방침인 미국에 볼모가 돼서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9일(한국시간) 한국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한국은 일본과 달리 외환 여력이 작고, 기축통화국이 아니라서 미국이 요구하는 직접투자 구조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발언했습니다.
실제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약 1조3000억달러(1672조원·2025년 기준)로 세계 최대 수준이지만, 한국은 4000억달러대에 그쳐 격차가 큽니다. 같은 규모의 직접 대미 투자를 집행할 경우, 한국이 받을 외환시장 충격이 일본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입니다.
이에 정부는 직접 투자를 5% 안팎으로 제한하고, 나머지는 보증으로 충당해 실질 부담을 줄인다는 구상을 해왔습니다. 3500억달러는 지난해 힌국 국내총생산(GDP) 20%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어떤 이면 합의도, 국익에 반하는 결정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또 비자 문제와 관련해 "현재 상태라면 미국 현지 직접 투자는 우리 기업들 입장에서 매우 망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미 경제정책연구센터(CEPR) 선임경제학자 딘 베이커는 11일(현지시간) CEPR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상호관세가 25%로 되돌아가더라도 한국의 대미 수출 감소액은 125억달러(약 17조원) 수준"이라며 "3500억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기보다는 피해 기업·노동자를 직접 지원하는 편이 훨씬 이익"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합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언제든 더 많은 돈을 요구할 수 있어 신뢰할 수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한편, 크리스토퍼 랜도 미 국무부 부장관은 14일(한국시간) 한·미 외교차관 회담에서 최근 발생한 '대규모 한국인 구금 사태'와 관련해 유감을 표하고, 유사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미 고위 당국자가 이번 사태에 대해 유감을 밝힌 것은 처음입니다.
유지웅 기자 wisema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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