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일반적으로 태국과 베트남을 떠올리게 합니다. 온화한 기후 탓에 전 세계 최고의 휴양 국가이자 관광 국가로 알려진 곳입니다. 하지만 이들과 맞닿아 있는 인도차이나반도 유일의 내륙 국가 '라오스'. 낯선 만큼 모든 것이 어색하지만 그 속살을 살펴보면 의외로 우리와 많은 부분이 통할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한 곳이기도 합니다.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의 글로벌 프로젝트 '은사마'가 주목하는 해외 거점 국가 라오스의 모든 것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미성년 쭐라롱꼰왕과 희한한 권력구조
쭐라롱꼰이 열다섯 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실제 통치자는 두 사람이었다. 섭정 추웡과 부왕(副王) 위차이찬이다. 쭐라롱꼰에게는 다행히도 섭정 기간은 '스무 살이 되는 때'까지로 명확했다. 싸얌에서 성인의 기준은 스무 살인데, 불교국으로서 비구계를 받는 나이가 성인 기준으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현재 선거 연령은 열여덟 살로 정해져 있다.
섭정이 된 인물은 추웡으로, 그는 '분낙' 가문의 수장이었다. 추웡이 수상을 맡았고, 분낙 가문은 사실상 내각처럼 왕정의 실무를 책임졌다. 이 가문은 쭐라롱꼰이 절대왕정을 완성하고 왕위 계승법을 만들 때까지 왕에 대한 지명권을 행사했다. 라마 2세는 창업자가 생전에 부왕으로 지명을 해두었으나, 왕국을 실제로 통치한 것은 분낙 가문이었다. 라마3세, 라마 4세(몽꿋), 라마 5세(쭐라롱꼰)까지 분낙 가문이 왕을 지명했다. 몽꿋이 출가를 한 것도 욕심이 없는 천성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분낙 가문의 눈치를 살핀 결과였다. 당시 싸얌에는 종법 제도나 형제 상속 같은 계위에 관한 법이나 규범이 없었다.
분낙 가문의 시조는 아흐마드라는 페르시아(이란) 출신 상인으로, 아유타야로 귀화했다. 이 가문은 아유타야 시절 무슬림에서 불교로 개종했다. 종교가 다르면 왕을 모시고 수행할 수 없어 왕의 권유로 개종한 것이다. 아유타야에서 왕실 시종으로 출발한 이 가문은 중시조 분낙에 이르러 라마 1세가 된 짜끄리와 친구이자 충복, 처남이라는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된다. 추웡이 왕을 지명하고 섭정을 담당할 무렵에는 국방, 외무, 재정, 항만과 무역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최대 실세 가문으로 성장했다. 쭐라롱꼰은 훗날 "모든 왕자들이 자신이 아니라 추웡을 따르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부왕 제도는 왕실 계승법이 없던 태국 왕조의 특별한 제도였다. 이 제도는 인도 문명에서 유래했으며 라오스 왕실에서도 활용되었다. 짜끄리 왕조의 부왕은 왕처럼 궁전에서 거주했는데, 왕이 기거하는 본궁(Grand Palace) 앞에 위치해 '전궁(Front Palace)'이라 불렸다. 왕이 통치 의지를 반드시 갖추었거나 능력이 출중하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왕을 대신해 전쟁과 정무를 감당할 수 있는 왕자나 실력 있는 귀족이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부왕 제도는 혼군이나 무능한 군주 혹은 왕의 유고에 대비하기 위한 제도로, 왕정을 보완하는 합리적 장점이 있었다. 비록 세습이 아닌 지명직이었으나 대물림되는 경우가 많아 왕권을 위협하는 세습적 실권자로 변질되기도 했다.
부왕 위차이찬은 서른 살로, 어린 왕과 달리 권력을 행사할 의지와 능력, 지위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부왕은 2000명의 병력을 갖추고 있었고, 영국 총영사와도 절친한 사이였다. 전궁 유지비로 왕실 수입의 3분의 1을 공식적으로 받을 수 있었고, 증기선으로 움직이는 전함을 보유한 독립 해군을 지휘하는 막강한 존재였다.
짜끄리 왕조 초기 최대 정치 가문의 수장 추웡. (이미지=구글 제미나이)
'구 싸얌' 대 '젊은 싸얌'
쭐라롱꼰이 성년이 되자 섭정 추웡은 물러났다. 왕은 첫 번째 개혁 조치로 감사원이란 이름의 재정부를 설치했다. 세금 징수 절차를 간소화했고 '국고' 개념을 처음 도입했는데, 이는 귀족에게 심각한 경제적·신분적 타격을 주는 정책들이었다. 귀족은 농장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해 물적 기반에 타격을 받았다.
왕은 칙령으로 추밀원도 구성했다. 따이 문명권의 왕국들은 한자 문명권의 3성 6부와 같은 조정이 없었고, 루이14세 이후 출현한 유럽식 궁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추밀원은 자문 기관에 불과했지만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40명의 위원이 정책과 정무를 검토하게 되면서 사실상 예비 내각의 성격을 띠었다.
부왕 위차이찬은 왕의 개혁 추진으로 신분적·경제적 타격을 받고 격분한 귀족들을 대변하며 권력 기반을 확대하고자 했다. 그는 암살 위협을 명분으로 600명의 경비병을 전궁에 진주시켰다. 본궁에 화재가 발생하자 그의 지휘를 받지 않는 병력이 왕궁에 진입하려 했다. 이는 무장을 동원한 왕과의 대치 상황이었고, 왕의 허락 없이 부왕 병력이 본궁에 병력이 진입하는 것은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왕은 부왕이 화재를 방치했다는 명분으로 전궁을 포위했다. 부왕은 버티지 못하고 결국 영국 영사관으로 피신했다. 싸얌 궁중에서 내전 직전까지 갔던 이 사건을 '전궁의 위기'라고 한다.
왕과 피를 나눈 형제인 왕자들은 왕의 확고한 정치적 동지였다. 이들은 '젊은 싸얌' 세력으로 조직됐고, 부왕과 왕실 귀족은 '구 싸얌' 세력으로 뭉쳐 신구 대결 구도가 형성됐다. 몽꿋왕에게서 서양 교육을 받은 왕자들은 영주들로 분산돼 있던 봉건 체제를 해체한 절대왕정의 권능을 이해하고 있었다. 므앙으로 분산되고 귀족과 정치 가문에게 휘둘리는 싸얌 왕국에서 '젊은 싸얌'에게 절대왕정은 그들이 지향해야 하는 매력적인 정치 모델로 받아들여졌다.
왕은 전궁의 위기 수습을 위해 전 섭정 추웡을 불러들여 중재자로 삼았다. 젊은 싸얌과 구 싸얌, 어느 쪽도 확고한 세력적 우세를 점하지 못한 상태에서 최대 정치 가문을 끌어들인 것은 현명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노련한 외교 수완을 갖춘 추웡은 영국 해협 식민지 총독을 앞세워 4촌 간의 협상을 중재하게 했다. 총독은 종합적으로 상황을 검토한 뒤 왕의 조건을 모두 부왕이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위차이찬은 왕국으로부터 경비 지원을 받으며 전궁에 거주할 수 있었지만 부왕 지위를 비롯한 모든 정치적 권한을 박탈당했다. 왕은 구 싸얌의 저항을 무혈로 진압하며 개혁을 지속할 수 있게 됐다.
'구 싸얌' 세력의 대표 위차이찬. (이미지=구글 제미나이)
노예제 폐지와 관련한 그럴듯한 허구
한편 왕은 첫째 왕비 쑤난타를 특별히 총애했다.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왕에게는 4명의 정비를 포함한 154명의 배우자가 있었다. 만삭의 왕비가 공주와 함께 별궁으로 향하던 중 짜오프라야강에 빠지는 사고가 있었다. 수심은 얕았고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지만, 귀한 몸을 노예의 손으로 구하면 처형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순간에 사랑하는 아내와 딸, 뱃속의 아이까지 잃은 왕이 슬픔에 잠겨 노예제를 폐지했다는 이야기가 따이인에게 퍼져 있고, 한국에서도 '비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것들'이란 제목으로 전파를 탔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왕의 기록에 따르면, 사고는 선박 충돌 때문이었고 선원과 수행원들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구조하려 시도했으며 귀한 몸을 만진 이 중 처벌된 사람도 없었다. 사건은 1879년에 발생했으며 노예제 폐지는 이미 1874년에 시행 중이었다. 이는 전왕인 몽꿋왕도 시도했던 정책이었다. 당시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노예였으므로 왕의 은혜를 입은 신민들이 왕에 대한 보은적 미담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따이 문명권에서 왕은 절대적인 군주가 아니었다. 라마 5세 쭐라롱꼰은 따이 문명권에서 최초로 왕다운 싸얌왕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아버지인 라마 4세 몽꿋과 함께 세계사적으로 드문 근대화 개혁을 주도한 부자(父子) 명군으로 평가된다.
쭐라롱꼰의 첫 왕비 쑤난타. (이미지=구글 제미나이)
라오스=프리랜서 작가 '제국몽'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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