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운 유라시아(7)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된 또 하나의 기적
1990년대, 한국과 러시아 극동의 시간이 만나다
IMF와 디폴트를 함께 버텼던 사람들
'한강의 기적' 너머 '극동의 기적'의 나날들
2026-01-27 06:00:00 2026-01-27 06:00:00
지금 돌이켜 보더라도 1990년대의 그 10년은 러시아와, 그리고 제가 살고 있는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장 큰 변화가 시작된 시기였습니다. 특히 한국의 기업과 상품, 사람들이 극동의 작은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오면서 이 도시의 '경제 영토'가 세계지도 위에서 확연히 확장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한국과 러시아 양국 정부 간 경협 사업을 위해 파견돼 온 종합상사와 제조사, 물류회사 관계자들은 제게 친구이자 동업자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들 한국 기업인들은 불과 몇 년 사이 하바로프스크와 이르쿠츠크 같은 극동 주요 지역은 물론, 러시아의 핵심 도시인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더 나아가 알마티와 타슈켄트, 키예프, 바르샤바 등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각지로 빠르게 재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루스키 대교와 한·러 항로 여객선 'Eastern Dream'. (사진=위키미디아 커먼즈)
 
그야말로 이 시기의 한국 기업인들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외치며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CIS) 지역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물류의 시작과 끝에 놓여 있던 블라디보스토크의 사업가들 역시 같은 배를 탄 운명처럼 이들과 어울리며 함께 성장해 나갔습니다.
 
저는 이 시기의 역사를 단순히 얼마나 많은 제품을 얼마에 팔았느냐의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한국 기업들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점으로 러시아와 CIS, 중앙아시아, 유럽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산업 동맥을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지도 위의 지리적 연결을 넘어, 사람과 물건, 그리고 새로운 문화의 흐름과 리듬을 만들어낸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뒤 중국 정부는 '일대일로'라는 국가 전략을 내세우며 막대한 자본과 인력을 동원해 글로벌 차이나를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은 중국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비슷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반면 여전히 미국과 서유럽, 동남아시아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었던 일본은 우리에게 아직 멀게 느껴졌다는 것이 솔직한 제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시기에 한국과 러시아는 거의 동시에 20세기 후반 최대의 경제 위기를 맞게 됩니다. 1997년 한국은 IMF 외환위기를 겪었습니다. 원화 환율은 단기간에 800원대에서 1600원 이상으로 급등했고, 자동차와 건설, 철강, 금융 등 주요 산업과 기업들이 무너지는 국가 부도 사태를 겪었습니다.
 
이듬해인 1998년 러시아는 더욱 극단적인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해 초 달러당 6루불 수준이던 환율은 중반에 24루불을 넘어서며 네 배 이상 폭락했고, 결국 러시아 정부는 국가 디폴트, 즉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 시기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선진국 기업들은 '탈(脫) 러시아'를 단행하고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떠나는 선택이 합리적으로 보이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한국 기업과 한국인들은 전혀 다른 결정을 내렸습니다. 정부와 기업의 기초 체력이 바닥난 상황이었고, 러시아의 정치·경제적 미래도 가장 불투명해 보이던 시기였지만, 기업인과 주재원, 외교관은 물론 선교사와 유학생 같은 민간인들까지 이곳에 남아 삶을 추슬렀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위기를 극복하자며 버텨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처음 만난 외지인에게 쉽게 웃어주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처음 러시아인을 접한 외국인들은 혹시 화가 난 것은 아닌지, 자신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닌지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번 마음을 열고 친해진 사람과는 수십 년을 친구로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몇 년 만에 다시 만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같은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가장 힘들었던 위기의 시간에 끝까지 남아 시련을 함께 견뎌낸 한국 기업과 한국 친구들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산 상품은 더 이상 단순히 품질 대비 가격이 좋은 상품에 머물지 않게 됐습니다. 끝까지 현장을 지켰던 박 대리와 이 과장, 김 부장은 이제 러시아 기업인들에게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가 됐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1999년 12월31일을 맞이했습니다. 이른바 'Y2K'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컴퓨터 오류로 인한 지구 종말을 두려워했고, 구소련 시절의 원자력 시설과 수도, 난방 등 인프라에서 대재앙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도 퍼졌습니다. 많은 외국인들이 다시 한번 러시아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제 한국 친구들은 그때도 여전히 러시아와 CIS 곳곳에서 새해 인사를 보내왔습니다. 모스크바대학 앞 레닌 언덕에서 2000년 1월1일 0시를 맞이한 친구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전화를 걸어왔을 때, 저는 이미 동방의 맨 앞에서 21세기의 첫 해돋이를 보고 있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함께 웃고 떠들던 그 순간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모스크바대 본관 전경. (사진=위키미디아 커먼즈)
 
그리고 21세기의 동이 트자마자 한국과 러시아는 거짓말처럼,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것 같던 혹독한 경제 위기를 빠르게 벗어났습니다. 6·25 전쟁 이후 88올림픽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의 발전을 세계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한강을 바라볼 때면 이는 참 잘 만든 표현이라는 생각이 지금도 듭니다.
 
저는 감히 1990년대 초반의 세계 정치 지형 격변기와 후반의 IMF 사태, 러시아의 디폴트, 그리고 2000년대 초반까지의 시간을 러시아 시민들과 한국인들이 만든 '극동의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 기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지금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의 성장 잠재력을 품고 있다고 믿습니다.
 
과거에 이뤄낸 것보다 앞으로 만들어갈 일이 훨씬 더 클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지금은 조용히 숨을 고르며 준비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함께 무엇을 해냈는지를 들여다볼수록,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에 대한 예상 또한 점점 또렷해집니다.
 
다음 글에서는 21세기 초반으로 접어들며 한국의 기업과 상품은 물론 문화적 측면에서 한국과 러시아가 어떻게 교류의 폭을 넓혀갔는지 되돌아보겠습니다.
 
유리 시바첸코 루스퍼시픽그룹 컴퍼니대표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
0/300

뉴스리듬

    이 시간 주요 뉴스

      함께 볼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