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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28화)“아리 아리 아리랑고개 되어”
고개 이야기
2016-08-01 06:00:00 2016-08-01 06:00:00
지난 6월초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열렸을 때 하루 종일 세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그 중 두 편의 영화에서 ‘아리랑’이 흘러나왔는데, 하나는 2014년 기준으로 중국에 생존해 있던 일본군 위안부 22명 중 한 명인 조선 출신의 박차순(중국명: 마오 인메이, 毛銀梅) 할머니가 부르는 아리랑이고(궈커, <22: 용기 있는 삶>), 다른 하나는 카자흐스탄의 고려극장 배우가 부르는 아리랑이다(김정,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 각각 한반도를 떠나 상이한 공간에서 같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들의 삶이 무겁게 다가온다.
 
정조와 지지대고개
 
수원 화성(華城)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정조(1752~1800)가 불운하게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조, 1735~1762)의 묘를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록되었다. 축성 당시 실학자인 정약용이 거중기를 고안해 사용함으로써 건축 기술사적으로도 의의가 큰 이 성은 정조대왕의 효심과 왕도정치에 대한 포부를 담고 있다고 일컬어진다. 
 
정조가 1795년 윤2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현륭원, 융릉)이 있는 화성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정조대왕 능행반차도(陵幸班次圖)'―추존왕이 되기 전 세자의 신분임을 감안하여 능(陵)이 아닌 '원행(園幸)반차도'로 부르기도 한다―는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주요한 사료로 꼽힌다. 
 
정조가 현륭원에 참배를 갈 때마다 넘었던 고개가 지지대고개(지지현, 遲遲峴)인데, 수원과 의왕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이 고개는 원래 사근현(沙近峴)이라 불렸으나 정조가 '미륵현'으로, 그 후 다시 '지지현'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참배하러 갈 때는 아버지의 묘가 눈앞에 보이는 데도 거기까지 가는 시간이 너무 더디게 느껴진 반면, 참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갈 때는 그 고개를 넘으면 더 이상 아버지의 묘가 보이지 않아 안타까워 자꾸 돌아다보는 바람에 행차가 지체되어 더딜 지(遲)자를 두 개 써 지지대라 하였다 하니, 아버지를 향한 정조의 사무치는 심정이 전해진다. 1807년(순조 7년)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화성 어사 신현의 건의로 지지대고개 옆에 지지대비(遲遲臺碑)를 건립하였는데, 홍문관제학 서영보가 비문을 짓고 윤사국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정조 화성친행반차도. 정조가 화성에 행차하는 장면을 긴 화폭에다 이어 그렸다. 사진/뉴시스
 
한냥고개, 아리랑고개
 
한편 <만인보>는 이 지지대고개의 이전과 이후에 대해서도 긴 시로 이야기해주고 있다. 
  
화성 십리 밖에 지지대가 있것다
정조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 다녀가다가
돌아다보고
돌아다보고 하는 곳이어서
신하들이 일부러 어가 행렬을 늦췄것다
그런데 이 고개가
임금고개 지지대고개 되기 전에는
한냥고개 도적고개였것다
과객이 고개 넘을 때마다
어디서 말소리 들리는데
그 소리인즉
한냥만 내고 가거라
더도 말고
한냥만 내고 가거라
그냥은 못 넘어간다
어떤 사람은 갖은 꾀 다 내어
순 공짜로 다섯번째 넘는 판인데
이 거사야
다섯 번이나 공짜배기로 넘어가느냐
한 냥만 내고 가거라
화성고을 백성들 일컫기를
한냥고개 도적은 도적이 아니라
미륵당 미륵불이라 하였것다
때는 중종 조광조파가 무너지고
남곤이 권세 잡았으니
호조 창고에 곡식이 없어도
남정승 창고에는 쌀이 썩어나는 판이렷다
< … >
바로 이때
한냥고개 한냥도적 뜻한 바 있어
이 고개 작파해버리고
관악산 도적 백명을 거느려
남정승 집 탈탈탈 털어버렸것다
두목 배서방이 바로 한냥고개 도둑이렷다
그 뒤로 도둑고개가
지지대 임금고개 되었것다
그 뒤로 임금고개가
아리 아리 아리랑고개 되어
뭇 백성 넘었것다
넘어 간도땅으로 숟가락 몽댕이만 가지고 갔것다
(‘한냥고개’, 3권)
 
남곤(1471~1527)은 초기 사림파 정치인으로, 성리학자 김종직 학파의 일원인지라 조광조와도 친분이 있었으나 신진 사림파의 급진적 개혁정책에 반대해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 때 훈구파의 조광조 일파 숙청에 가담한 인물이다. 굶주린 백성은 주면 받고 안 주면 못 받는 양심 있는 도둑, 목소리만 있는 숲 속의 ‘한냥도둑’이지만, 남곤으로 대변되는 정승은―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으나―창고에 쌀이 썩어나는 큰 도둑인 셈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아카이브: 한국구비문학대계'를 보면 <한냥고개 설화>가 있는데, 이 '한냥도둑'은 주기적으로 숲에 가 한냥을 놓고 가거라 해서 사람들이 놓아 둔 한냥을 집어다가 노모와 연명하는 가난한 선비이다. 그런데 어느날 수십 명의 사람들이 그에게 도둑질을 배우기 위해 그가 한냥을 챙기러 모습을 드러내자 그 순간을 포착해 그를 업어간다. 설화에서 묘사되듯이, 산목숨 끊을 수 없어 도둑질이라도 하고자 그에게 두령이 되어 주십사 하는 것이다. 기근과 폭정에 시달리다 아리랑고개를 넘어 간도로 간 백성들의 상황도 이들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향마을 고개들
 
고은 시인은 고향마을의 지명이 드러난 고개들도 노래하고 있는데, 잘 살펴보면 그 안에 엿보이는 사람들의 심정이 앞서 등장한 인물들의 심정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다음 시에 나타나는 아들의 심정과 부자(父子) 간의 정은, 정조가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느끼는 심정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무덤에서 아들을 보듬어 주었을 법한 부정(父情)을 연상시킨다.
 
백두개 개바위 지나면
옥산면 삼형제고개
첫 고개 넘어가면
둘째 고개
그 고개 넘어가면
셋째 고개
그 셋째 고개가 막내고개인데
거기 물이 좋아
옛날에는 노루가 와 물 먹고 갔다 한다
< … >

어느 날 밤 그 고개 막내고개에서
도깨비하고 씨름하고 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당북리 수길이
그 수길이 아들 나서서
아버지 원수 갚는다고
밤마다 몽둥이 들고 지켜보았으나
도깨비는커녕

며칠 밤 그렇게 보내고 나서
아버지 무덤에 가
아버님 원수 못 갚았습니다
저는 자식도 아닙니다
하고 주정부리며 울었다
그러자 무덤 속 아버지 하는 말인즉
아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 아들이고말고
그리고 삼형제고개 도깨비는
내 마음속 허깨비였느니라
너는 내 아들이다
삭망날 밥 먹으러 갈 테니
밥 푸짐하게 상에 올려다오 내 아들아
(‘삼형제 고개’, 6권)
 
한편, 고개 넘어 골짜기에 사는 도깨비 또한 일제강점기의 현실을 피해갈 수는 없는 듯하다.
 
"백두개고개 넘어서 / 후미진 골짜기에" 사는 "도깨비 아저씨"는 "외약다리는 영 못 쓰니 / 아무리 보리방아 엽치는 도깨비 덤벼도 / 정신 딱 차리고 외약다리 감으면" 되는데, "왜놈들 그 골짜기 소나무 다 베어간 뒤 / 도깨비 아저씨도 숲이 있어야 살지 / 어디 가서 사는지 뒈졌는지" 알 수가 없다('백두개 도깨비', 1권).
 
마지막으로, '한냥도둑'의 후손은 자신이 여전히 숲인지라 "길 막은 적 없"고 "숲 속에서 말할 따름"이지만, "내놓을 만큼 내놓고 넘어가 / 안 그러면 못 넘어가"라고 해서 "밤길 가는 사람 / 그 누구도" "가진 것 다 털어놓아야 / 늘어붙은 발 / 겨우 떨어진다" 하니 그 배포가 많이 커진 듯이 보인다('독점고개 강도', 6권). 이런저런 고개에 붙여진 이름의 변천사나 고개에 얽힌 이야기들은 굽이굽이 고단한 삶을 살아온 백성들의 숨결이 켜켜로 스며들어 나온 역사의 산물이지 않을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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