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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30화)여성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한다
“한 아낙 포부를 나라에 두다”
2016-08-22 06:00:00 2016-08-22 11:58:43
지난주는 청와대발 ‘건국절’ 논란이 폭염에 지친 국민들에게 전기료 누진제 문제에 이어 새로운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광복절 경축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작년의 ‘건국 67주년’ 발언에 이어 올해에도 ‘건국 68주년’을 언급하기 바로 3일 전인 8월 12일, 독립유공자와 유족들을 초청한 청와대 오찬에서 92세의 전 광복군동지회장 김영관 선생이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주장하는 것이 헌법위배와 역사왜곡임을 밝혔지만 결국 ‘마이동풍’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의 역사적 의의를 알고 있다. 그리고 오늘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여성의병장 윤희순(1860~1935)
 
한국 최초의 여성의병장이라는 호칭이 붙는 윤희순 의사는 16세 때 춘천지역 의병장 외당 유홍석의 아들 유제원과 결혼했는데, 시아버지 유홍석도, 그와 재종형제지간인 의병장 의암 유인석도, 또한 친정아버지인 윤익상도 모두 화서 이항로를 스승으로 하는 ‘화서학파’의 일원인지라 윤희순 선생이 ‘위정척사’ 유학자 집안의 가풍 속에서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나고 시아버지 유홍석이 의병장으로 출정하자 윤희순은 의병들에게 음식과 옷을 나누어주고 <안사람 의병가>와 <안사람 의병가 노래>를 지어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는데, 후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의병들은 나라찾기 힘쓰는데 / 우리들은 무얼할까 의병들을 도와주세 / 내집없는 의병대들 뒷바라질 하여보세 / 우리들도 뭉쳐지면 나라찾기 운동이요 / 왜놈들을 잡는거니 의복버선 손질하여 만져주세 / 의병들이 오시거든 따뜻하고 아늑하게 만져주세 / < … >”.
 
1907년 일제가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해 정미의병이 봉기하자 시아버지 유홍석은 다시 의병장으로 나서는데, 윤희순도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의병을 조직해 군자금을 모으고 화약과 탄약을 만들어 지원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유홍석과 유제원이 만주로 떠나고, 1911년 윤희순도 세 아들을 데리고 유씨 일가, 다른 의병 가족들과 함께 뒤따르게 되는데, 그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요령성 신빈현 평정산(平頂山) 난천자 마을 근처 산속 고려구이다. 이들이 떠날 때의 정황은 다음과 같았으리라.
 
1911년 1월
나라 잃은 백성
왜적을 피해 떠난 것이
1피
 
1912년
왜적을 피해 떠난 것이
2피
 
1913년 여름
왜적을 피해 떠난 것이
3피
 
그뒤로 4피 5피 6피…로
1931년 만주사변중에도
1942년 대동아전쟁중에도 이어져 떠나고
떠났다
솥 하나 지고
이불 하나 지고
아픈 아이 업고 떠났다
몇백년이나
떠날 줄 모르던 농투성이들 떠나고 떠났다
 
나라 찾을 내일과
나라 잃고 굶주리는 오늘
긴 석양길 산등성이 넓었다
< … >
(‘삼피(三避)’, 17권)
 
산간 황무지에서 땅을 일구며 의병가족들과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윤희순은 1912년 요령성 환인현으로 이주해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동창(東昌)학교의 분교인 노학당(勞學堂)을 남괴마자 마을에 설립하고 항일운동가들을 양성하게 된다. 1913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별세한 후 1915년에는 남편 유제원, 시댁 어른 유인석까지 세상을 떠나고 노학당도 일제에 의해 폐교 당한다. 그러나 윤희순은 절망하지 않고 무순 포가둔(현 신촌)으로 이주해 아들 유돈상, 유민상, 그리고 중국인과 다른 동지들이 포함된 ‘조선독립단’을 조직해 북산에서 훈련하며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일경의 눈을 피하느라 윤희순 일가는 이주를 여러 번 반복해야 했는데, 1934년 일본군이 봉성현 석성 동고촌에 있던 윤희순의 집과 마을을 불사르자 또다시 해성현 묘관둔으로 옮겨가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살게 된다. 필자가 이미 꽤 알려진 윤희순 의사를 다시 소개하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당시 묘관둔의 윤희순과 그의 이웃인 한족 갈복순, 장영방 부부가 나눈 우정이 매우 인상적이어서이다. 지난 7월말 ‘아세아역사문화연구소’가 주최한 만주항일운동 유적지 탐방에서 이규태 소장의 안내로 필자를 포함한 참가자들은 지금까지도 윤희순 의사의 묘를 돌보고 있는 갈-장 한족 부부의 손주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중국 해성현 묘관둔 윤희순의 허묘를 벌초하는 한족 갈씨 옹. 앞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사진/필자
 
1935년 6월 13일 큰아들 유돈상이 일경에 체포되어 무순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결국 7월 19일에 사망하자, 윤희순 의사는 곡기를 끊고 8월 1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방인인 자신에게 살 곳을 제공하고 먹을 것을 나눠 준 묘관둔 사람들에게 윤희순은 감사한 마음으로 벼농사를 가르쳐 주었다. 윤희순이 사망하자 마을사람들은 묘를 만들었고, 갈씨는 자식에게 유언을 남겨 그 손주 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무덤을 돌보아 오게끔 한 것이다.
 
1994년 윤희순의 후손에 의해 유해가 춘천으로 이장됨에 따라 이 무덤은 허묘로 남아 있지만, 한여름 무성한 옥수수밭을 뚫고 들어가 묘관둔 친구들이 만든 무덤을 보여주고 잡초를 베는 갈씨 손주 노부부에게 고개가 숙여짐은 민족을 뛰어넘는 우정과 휴머니즘에 경의와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리라. 윤희순 의사의 유해가 한국으로 봉환된 뒤 이 허묘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그녀와 인간적 정을 나눈 마을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보는 이로 하여금 상념에 젖게 한다.
 
윤희순 의사의 묘를 찾아가는 갈복순 어른의 손주 부부. 사진/필자
 
‘여자 안중근’, ‘독립군의 어머니’라 불린 남자현(1872~1933)
 
2015년 영화 <암살>의 주인공 안옥윤의 모델이라 해서 주목받았던 독립운동가 남자현은 83년 전 오늘인 8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만인보>가 이야기해주는 남자현 의사의 생은 이러하다.
 
1872년 태어나다 1933년 죽다
경북 영양 석보에서 태어나다
열아홉살에 시집가다
남편 김영주
김도현 의병부대 참전중 전사하다
 
유복자 키우며
시집에 머무르다
1919년 만세운동 일어나자
두메에서 떨쳐나
만세 부르며
고향을 떠나다
 
한 아낙 포부를 나라에 두다
 
압록강 건너
서간도 서로군정서
독립군 주방에서 일하다
주방 떠나
일본 총독 암살을 위해 잠입하다
실패하다
 
만주 길림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1931년 김동삼 장군 체포 압송중
구출계획 세웠으나
실패하다
 
1932년 국제연맹조사단에
손가락 두 마디 잘라
혈서 써
독립청원을 하다
 
일본 만주 전권대사 격살하려다 체포당하다
심한 고문 받다
1933년 하얼삔에서 죽다
< … >
(‘남자현’, 16권)
 
시에서 나타나듯이, 남편 김영주가 1895년 을미사변 후 의병으로 출정했다가 1896년 7월에 전사하자 남자현은 유복자를 기르고 시부모를 봉양하며 살다가 기독교에 입문해 독립의식을 고취하게 된다. 3ㆍ1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만주로 떠날 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47세였다. 안동 유생 남정한의 딸이었던 남자현은 안동에서 만주로 건너간 석주 이상룡의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만주로 가자 곧바로 김동삼의 서로군정서에 가입해 군자금 모집, 무장독립운동 단체들 간의 통합 노력, 독립운동가의 옥바라지 등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10여개의 교회와 20여개의 여성교육기관 설립을 주도했다고 한다.
 
남자현 의사가 ‘여자 안중근’이라 불리게 된 것은 그녀가 무장투쟁과 테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인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앞의 시가 이야기하는 조선 총독과 만주 전권대사의 암살 시도이다. 남자현은 1926년 4월 만주 길림에서 박청산, 이청수, 김문거와 함께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암살을 계획한 후 경성으로 잠입했으나 암살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7년 후인 1933년, 3월 1일 신경(현 장춘)에서 열리는 만주국 수립 1주년 행사 때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자 만주국 일제전권대사인 부토 노부유시를 자신이 처단하기로 한다. 2월 27일 걸인 노파로 변장한 채 신경으로 가기 위해 길림에서 하얼빈으로 온 남자현은 그러나 밀정에 의해 정보가 새어 나가 일경에 체포되고 만다. 그녀가 체포될 때 옷 속에는 오래 전 남편이 의병운동을 하다 전사할 때 입었던 피 묻은 군복을 껴입고 있었다고 한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투옥생활을 하던 남자현 의사는 8월 들어 여러 날 단식 끝에 17일 병보석으로 석방되지만 결국 5일 후에 운명을 달리하고 만다. 임종 직전 남자현은 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에게 감춰둔 행낭을 가져오게 해, 그 안에 있던 돈 총 249원 80전 중 200원은 조선이 독립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치고 남은 돈 49원 80전 중 절반은 손자의 학자금에, 나머지 절반은 친정에 있는 종손을 찾아 공부시키는데 쓰라는 유언을 남기는데, 이 유언은 후에 다 이루어지게 된다. “백계 러시아 공동묘지에 묻”힌(앞의 시) 남자현 의사의 죽음은 별세한 지 5일 후인 1933년 8월 27일자 조선중앙일보에 “무등대장 모살범, 남자현(여) 遂 별세, 단식으로 극도로 쇠약한 결과, 22일 하얼빈에서”라는 제목의 기사로 보도되었다.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스탄케비치(1885~1918)
 
알렉산드라 김-스탄케비치는 사회주의자라는 배경 때문에 그동안 남한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연해주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 김두서는 함경도 경흥사람으로 생활난을 해결하려고 고향을 떠나 중국의 간도와 훈춘을 떠돌다가 1869년 러시아 원동 우수리 변방에 정착해 개간을 시작했다. 1860년대는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가 시작된 시기였는데, 특히 1869년은 함경도에 대기근이 들어 연해주로의 이주가 급증한 때였다. <만인보>에 김알렉산드라를 직접 묘사한 시는 없지만, 그녀의 가족처럼 러시아 원동에 정착해야 했던 조선인 이주민들과 거기까지 쫓겨 가야 했던 의병들의 모습은 엿보인다.
 
조선
만주
아라사
세 국경이 만나는 하싼
뿌질로프까 마을
 
조선 농투성이들 몰래 건너가
마적떼
아직 없는 두메
건너가
납작집 지어 비바람 가렸다
 
하루에 세 나라 풀 뜯어먹는
소와 염소 기르며
두만강 기슭
새 잡으며
고라니 잡으며
씨도 뿌리고 사냥도 하며 살아갔다
 
사냥꾼 장길성이 딸 옥례
개울가 빨래하다가
말 탄 사람 만났다
굶어 눈이 푹 꺼져 있었다
말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을
옥례가 젖은 손 털고 내려주었다
집에 가서
찬밥 가져다 먹었다
일본군에 쫓겨온 의병이었다
< … >
(‘옥례 남편’, 18권)
 
알렉산드라 김-스탄케비치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원(볼셰비키)이 된 첫번째 한인(고려인)으로,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결성된 ‘한인사회당’의 중앙위원이었으며 창당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핵심적 인물이었다. 그녀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이 완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 이후 적군(혁명군)과 빨치산 대 백군(반혁명군)과 국제간섭군의 전투가 1922년까지 벌어지게 되는데, 볼셰비키로 항일투쟁을 하던 극동인민위원회 외무부 부장 김알렉산드라도 이 내전에 참여하게 된다.
 
하바롭스크를 점령한 백군에 의해 아무르강 기슭의 바위 위에서 총살당하게 된 그녀가 총살집행 직전, 자신의 두 눈을 싸맨 흰 수건을 벗어던지고 열세 걸음을 걸은 후 이는 조선의 13개도를 상징한다, 연설하고 숨을 거두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김알렉산드라의 최후에 대해서는 다른 설들도 존재하지만(정철훈 지음, <김알렉산드라 평전>, 1996, 251-252쪽), 분명한 것은 이 전설적인 볼셰비키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와 그녀의 업적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절실히 요구된다는 점이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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