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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38화)“죽은 시마저 갇힌 시마저 다 뛰어다닐 줄이야”
70년대 사람들⑤ ‘우리의 교육지표’를 밝힌 스승들
2016-10-24 06:00:00 2016-10-24 06:00:00
2년 전 불거졌던 ‘비선실세’ 논란에 덧붙여 이제는 그와 관련된 갖가지 비리와 의혹들이 곪아 터져 나와 나라 안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대기업들로부터 수백억 원의 출연금을 받은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의 실체에 이어, 이화여대에서는 비선실세의 딸을 위한 입시·학사 특혜 논란으로 인해 개교 130년 만에 교수들도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지난 19일 열렸다. 총장은 시위 직전에 사퇴했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이화여대 사태를 지켜보며 1978년 ‘교육지표 사건’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교육을 실현하고자 했던 참스승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리라.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의 배경 그리고 송기숙(1935~ )
근래 몇 년 사이의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마치 총체적 난국에 직면해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아마도 어떤 유사성 때문이겠지만―현 정권에 들어와 국민들이 70년대를 더욱 상기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만인보>의 여러 시들 중 70년대를 그린 시들을 요즘 들어 더 자주 언급하게 되는 것도 우연한 현상은 아니리라.
 
유신독재가 횡행하던 1970년대는 학원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나날이 심해지던 시절이었다. 예를 들어 1949년 결성되어 제1공화국의 관변단체로 이용되던 학도호국단은 1960년 4·19혁명 이후 한번 해체되었으나, 1975년 5월 13일 박정희 정권에 의해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후 5월 20일 학원에 다시 설치되어 80년대 중반 완전히 해체될 때까지 군사교육의 강화에 기여하게 된다. 학생들의 집회·시위 금지, 교수재임용제 도입 등 학원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면서 민주와 자유를 외치는 학생들은 구속·제적되고 교수들은 재임용 탈락 등의 방식으로 교단에서 추방당해, 1976년 학교에서 쫓겨난 교수들의 수가 4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77년 12월 2일 해직교수 13명은 ‘민주교육선언’을 발표하고 1978년 3월 24일 ‘해직교수협의회’를 발족한다.
 
마침내, 어용교수들과 정보기관원들의 감시가 판치는 대학의 민주적인 교육을 위해 뜻있는 교수들이 일어서게 되는데, 그것이 1978년 6월 27일 송기숙 교수를 비롯한 전남대 현직교수 11명의 서명으로 발표된 성명서 ‘우리의 교육지표’이다. ‘우리의 교육지표’는 이렇게 시작한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 한마디로 인간다운 사회는 아직도 우리 현실에서 한갓 꿈에 머물고 있다. < … > 그리고 온갖 시련과 경쟁 끝에 들어간 대학에서는 진실이 외면되기가 일쑤고 소중한 인재가 빈번히 희생되고 교육적 양심이 위축되는 등 안타까운 수난을 거듭하고 있다.” 약 40년 전에 쓰인 이 글은 현재의 교육·사회적 현실을 생각할 때 오늘 쓰인 것이라 해도 믿길만하다.
 
당시 양심적인 교수들이 교육지표로 제시한 것은,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교육의 참 현장인 우리의 일상생활과 학원이 아울러 인간화되고 민주화되어야” 하고, “학원의 인간화와 민주화의 첫걸음으로 교육자 자신이 인간적 양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적 정열로써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배워야 한다”는 것,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며, 그러한 간섭에 따른 대학인의 희생에 항의한다”는 것 등이다.
 
누가 이르기를 누가 정색으로 말하기를
천연기념물 송기숙
광주는 그가 있어 광주가 참다웠다
아무리 바람 찬 세월일지나
그가 있어 광주의 밤이 착하디착하였다
70년대 후반 이래
세칭 교육지표사건 이래
그의 행로는 위태위태 아리따웠다
 
< … >
 
그에게 가거라
원시 비슷한 것 짐작하려거든
그에게 가거라
고대 비슷한 음덕을 맛보려거든
 
그는 손으로 쓰다가 발로 쓴다
차라리 정신 따위는
자칫 관념을 낳아버려
그는 몸으로 쓴다
소설 <암태도>를
소설 <재수 없는 금의환향>을
 
< … >
(‘송기숙’, 12권)
 
교육지표 선언으로 인해 11인의 교수들은 모두 연행되고 해직되었으며, 소설가인 국문과 송기숙 교수는 7월 4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다. 교수들이 연행되자 전남대 학생들은 3일간 대규모 시위를 벌여 5백여 명이 연행되고 학생 14명과 YWCA 간사, 선언문을 인쇄해준 인쇄소 주인이 구속되었다. 조선대 학생들도 이에 동참해 7월 3일 ‘조선대학교 민주학생 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를 벌여 4명이 구속되었다. 이후 교육지표 사건은 대학뿐 아니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한국인권운동협의회 등 여러 사회운동단체들의 지지를 확산시키게 된다. 송기숙 교수는 광주민주화운동 때 다시 투옥되었다가 1984년 복직한 이후 1987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를 창설해 초대 공동의장을 맡는 등, 작가로서 학자로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삶을 잊지 않았다.
 
5.18 광주민주화항쟁. 사진/5·18민주화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
 
교육지표 선언의 중심에 선 낭송시인 성내운(1926~1989)
전남대 교수 11인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지만, 사실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은 송기숙 전남대 교수, 성내운 연세대 교수, 백낙청 서울대 교수 3인이 중심이 되어 ‘국민교육헌장’의 비교육적, 비민주적 내용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준비하고 전국적으로 최소 50명 이상의 교수가 참여하면 발표하기로 했던 것이라 한다. 그런데 참여도가 충분치 않아 성명서의 발표는 취소되었으나, 성내운 교수가 성명서를 각 대학 교수들에게 돌리고 영어로 번역해 외신에 보낸 후 광주에 가 송기숙 교수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성내운 교수가 그렇게 먼저 터뜨린 이유는 기실 송기숙 교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1973년 10월 19일 ‘유럽 간첩단 사건 수사 협조’를 위해 자진 출두했던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고문치사 당했던 것처럼 송 교수가 소리 소문 없이 당하지 않으려면 성명서를 아예 공개적으로 터뜨리는 편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송기숙과 함께 교육지표 선언을 주도한 성내운 교수는 당시 연세대 교육학과에서 해직된 상태였는데,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교수들과 학생들의 석방을 위한 '교수 기도회'를 진행하고 그간 정부와 교육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1976년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되었다. 이후 그는 해직교수협의회 회장과 한국인권운동협의회 부회장으로 일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1978년 교육지표 사건으로 인해 송기숙 교수와 함께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성내운 교수는 1979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지만, 11월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공동선언을 주도해 수배를 당하고 이후에도 복직과 해직을 반복하게 된다.
 
가령 충남 계룡산 갑사 위 산중에서
방금 잘못 내려와
어릿어릿한 산양인가 하면 아닐 터이지
 
아니 전생에는
새끼 많이 낳은
큰 암소인가
늙어서도
소리 하나 좋아
암소 우는 소리 가득한
금생의 마을인가 하면 아닐 터이지
 
< … >
 
악이라고는 통 몰라
교육학 으뜸이다가
그 교육학 덮어버리고 학문 때려치우고
어린 정신박약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뿔테 안경 속
그의 지선의 눈 가만히 담겨 있어도
정녕 그 무엇도 아닐 터이지
 
그런 사람이 시 읽어
죽은 시마저 갇힌 시마저 다 뛰어다닐 줄이야
(‘성내운’, 11권)
 
성내운 교수를 한번이라도 만나거나 그의 시 낭송을 들은 사람이라면 고은 시인이 묘사하듯 악이라고는 통 모르고 지선(至善)의 눈으로 아이들과 어른들, 학생들과 교사들을 대하던 그의 깊은 인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300여 편의 시를 암송한 성내운 교수의 시 낭송은 워낙 유명해 ‘시인은 시를 쓰고 그는 시를 완성한다’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그의 시 낭송이 깊은 울림을 가지는 것은 낭송하는 마디마디에 온전히 배어있는 이 선량한 교육자의 꾸밈없는 진심 때문이다. 해직과 복직의 반복 속에서 그는 1984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고문,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 변호인단, 1986년 ‘민주교육실천협의회’ 공동대표, 〈교육과 실천〉 발행인 등 부단한 실천의 길을 걸었다. 1989년에 출범한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와 해직교사들의 초청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원래의 일정을 취소하면서까지 달려가 그들을 따뜻이 격려했다고 하니, 교육민주화를 향한 그의 열망과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광주를 정신적 수도로 여겼던 성내운 교수는 1989년 광주대 총장이 되어 광주로 내려가 많은 활동을 하다가 혈액암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게 된다. 투병 당시의 일화를 전하는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의 말에 의하면(<한겨레신문>, 2011년 7월 14일자), 가족들이 그에게 기독교에 귀의할 것을 권하자 “그동안 뜻을 같이했던 동지들 중에는 기독교인도, 천주교인도, 불교인도, 원불교인도 있고 종교가 없는 분도 있는데 내가 어느 쪽으로 귀의를 하겠느냐. 우리 모두 함께인데…” 라고 하시며 돌아가셨다 한다.
 
교육지표 선언의 의의와 광주의 ‘털보다윗’ 명노근(1933~2000)
교육지표 사건으로 인한 전남대 해직교수 11인 중 한 명인 명노근 교수는 이 사건을 통해 실천적 지식인의 길을 걷게 된다.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가 복직되면서 그는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 깎겠다”는 의지로 수염을 기르게 되었고 이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명노근 교수는 광주 YMCA 간사에서 시작해 전국 YMCA 연맹 이사장까지 지낸 한국 YMCA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979년 광주 YWCA 구국기도회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며, 또한 1980년 광주항쟁 당시 송기숙 교수와 함께 시민수습대책위원을 맡아 ‘내란중요임무종사죄’로 또다시 옥살이를 하였다. 광주 보안대에 끌려간 송기숙 교수와 명노근 교수가 당시 김대중 씨로부터 공작금을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 강요당하며 고문 받을 때 서로 틀린 액수를 말해 다행히 사형선고를 피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전남대 캠퍼스는
캠퍼스 이전에는 벌레소리 못이었다
그런 못이 메워지고
날이 날마다 최루탄 가스밖에 없었다
그 대학 영문학 교수 명노근
< … >
 
충장로거리에서 만나면
그 검정 털보의 웃음이 길었다
그러기 전에
이마가 앞섰다
툭 불거져
 
말소리에는 엷은 수묵화 먹물이 스며들어
빈방을 울렸다
해직교수의 시절
집회 때마다 항상 와이셔츠가 깨끗했다
 
한번 만나면 이 이야기가 저 이야기 또 저 이야기
누구에게는 잔소리이고
누구에게는 비가 와 철철 넘치는 도랑물 소리이다
(‘명노근’, 13권)
 
2007년 7월 26일 전남대에는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 기념비가 세워졌다. ‘우리의 교육지표’는 박정희 정권이 1968년 12월 5일 공포한 ‘국민교육헌장’을 기조로 펼쳐 온 국가주의 교육정책에 저항하고 교육민주화운동의 불씨를 지핀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국민교육헌장은 일제의 메이지 천황의 명으로 발표된 ‘교육칙어’(1890∼1948)‘를 본뜬 것으로, 교육칙어를 바탕으로 한 ‘조선교육령’이 식민지 조선에서 시행되었던 것을 상기할 때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제국 신민들의 수신과 도덕 교육을 위한 것으로 군국주의적·국수주의적 성격을 띤 이 교육칙어가 일본의 학교 교육에서는 실효를 완전히 상실했음을 1948년 일본 국회가 확인해 주지만, 그를 상기시키는 국가주의 교육사상이 20년 후 대한민국 대통령의 지시로 다시 태어나 전국의 학교 곳곳에서 암기와 실천을 강요했던 것이다.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이 교육사적으로도 민주화운동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5.18 광주민주화항쟁. 사진/5·18민주화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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