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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세상읽기)창씨개명
2017-11-10 06:00:00 2017-11-10 06:00:00
나는 독일 사람과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독일 친구들은 기가 막히게 그들을 구분해 낸다. 우리도 그런 능력이 있다.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 일본, 중국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구분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중국 사람은 옷차림과 머리카락 상태로, 일본인은 얼굴 모습으로 쉽게 구분한다. 이런 구분 능력은 세 나라 사람에게 모두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아시아 사람들의 이야기고 유럽인은 극동의 세 나라 사람을 겉모습으로 구분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다 같은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럽인들도 자기 아랫집에 사는 사람이 일본 사람인지 한국 사람인지 확실히 구분하는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부부의 이름이다. 남편과 아내의 성(姓)이 같으면 일본 사람이고 다르면 한국 사람이다. 여자가 결혼한 후에도 원래 성을 유지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 혹자는 혈통을 중시하는 유교문화 때문에 시집간 여성도 원래 집안 성을 유지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일본뿐만 아니라 유교 문화의 본산인 중국 역시 공산당이 집권하기 전에는 ‘부인 성 앞에 남편 성을 붙여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던 것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여성이 결혼 후 성을 바꾸는 게 무슨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한 현대에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결혼 전에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명성을 쌓은 여성 과학자가 결혼하고 성을 바꾸면 신참 과학자 취급을 받게 된다.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 이전의 논문이 검색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 후 다시 열심히 연구해서 명성을 쌓은 여성 과학자가 이혼하면 어떻게 될까? 많은 경우에 이혼한 남편의 성을 포기하지 못한다. 재혼할 경우 이전 남편의 성과 현재 남편의 성을 함께 쓰는 경우가 많다.
 
이름은 중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한다. 이름 대신 번호를 부르는 교사에게 좋은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교회 여학생이 나를 그냥 오빠라고 부르지 않고 정모 오빠라고 불러주면 행복했다. 복도에서 만난 학생의 이름을 불러만 줘도 좋은 교수님으로 통한다. 
 
이름은 차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미국에 이민한 많은 외국인들이 평범한 미국식 이름을 쓴다. 일제 강점기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1910년 한일병탄 직후 일부 조선인들은 자신의 성명(姓名)을 자발적으로 일본식으로 고쳤다. 조선총독부는 이게 싫었다. 민족차별을 바탕으로 한 지배질서 유지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1911년 아예 총독부령을 시행하여 조선인은 일본인으로 혼동될 수 있는 성명을 호적에 올릴 수 없고, 이미 개명한 사람도 원래 성명으로 되돌리게 했다.
 
정책은 정치 상황에 따라 변하는 법. 중일전쟁에 조선인을 자발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표방하며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고 선전하는데 이름이 다르니 별 효과가 없는 것이다. 또한 결혼을 해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본래의 성을 유지하는 조선식 이름 제도가 황민화에 장애가 된다고 보았다. 1911년부터 1939년까지는 조선 사람이 일본식 이름을 갖는 것을 막던 일본이 1940년부터는 조선인이 일본식 성명을 갖게 하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게 되었다.
 
그날이 바로 1939년 11월10일. 딱 78년 전의 일이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 2월11일부터 6개월 동안 씨를 새로 정해서(創氏) 제출토록 했다. 하지만 석 달이 지나도록 창씨 신고 가구가 8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자 강제했다.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입학과 취직에 불이익을 당했다. 식량과 물자의 배급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조선식 이름으로 발송된 철도화물은 취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중들이 이름을 쉽게 바꾸겠는가. 언제나 그렇지만 명망가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한다. 조선의 유명 인사들이 나서서 독려하자 창씨 가구 비율이 80퍼센트까지 올랐다. 이름을 바꾸지 않은 명망가들도 많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창씨개명에 저항한 것은 아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창씨개명이 강제적인 게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도구로 선택되었을 뿐이다. 방응모, 정미7적 가운데 하나인 이병무, 육군 중장을 지낸 홍사익이 대표적이다.
 
우리는 꽃과 새, 강 같은 자연뿐만 아니라 사람을 이름으로 기억한다. 결혼 후에도 여성이 자신의 원래 이름을 지키는 우리의 제도는 자랑스럽다. 다만 이 제도가 여성의 지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여성이 이름뿐만 아니라 몸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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